맑은 고을 청주의 대를 이은 효자이야기
맑은 고을 청주의 대를 이은 효자이야기
  • 김명철<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8.04.25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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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우리 고장 충북은 역사적으로 충효의 고장이다. 특히 효를 실천하고 이를 기리는 효자비와 효부비, 그리고 정려문과 현판이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에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백정의 효자비인 `양수척효자비'와 `효촌'이라는 마을 이름 자체가 효와 관련된 곳도 있다. 그중에서도 몇 대를 이어 효를 실천하여 나라로부터 인정받은 `정려'가 있는 가문과 마을이 있다. `정려'란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의 행적을 높이 기리기 위해 그들이 살던 집 앞에 문을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작은 정각을 세워 기념하는 것을 말한다.

청주 탑동에는 조선시대 4대에 걸쳐 5인(곽여찬과 아들 부부인 곽진은과 이씨 부부, 손자 곽원호와 증손자 곽상조)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현풍 곽씨 효자비가 있다. 비석들은 모두 정면 1칸, 측면 1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건립된 정려 안에 있다.

곽여찬은 조선 순조 때의 사람으로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묘를 돌보았는데, 이 같은 효행이 알려져 정려를 받았다. 아들 곽진은은 병이 난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보살핀 효행으로 정려됐다. 곽진은의 정려문은 부부 정려문으로 되어 있는데, 건물 내부에 효자비와 효부비가 함께 세워 있다. 그리고 곽원호는 곽진은의 아들로, 부모가 돌아가신 뒤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50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묘소를 지키다가 숨을 거두었다.

청주 현도면에도 3대 걸쳐 효도를 실천한 `삼효정'이 있다. 현도초등학교 옆에 있는 삼효정은 1839년(헌종5)에 오상진과 아들 오진택 증손자 오정기 3인의 효행을 기리어 합설한 `정려'다. 1950년 새롭게 건축하고, 1978년에 보수한 정면 1칸 측면 1칸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보성 오씨 오상진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심성이 착하여 주위로부터 칭찬이 자자했는데, 아버지가 병이 들자 변의 맛을 보아가며 병간호를 하는 등 정성을 다하였으며, 병이 위중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드시게 함으로서 원기를 회복하도록 하였다. 그의 아들 오진택은 부친의 심성을 이어받아 효성이 지극했으며, 계모를 맞이하여서도 생모와 다름 없이 극진하게 모셨다고 한다.

부친의 제사를 맞아 홍수로 인해 길이 막히어 제사용품 장만을 못하고 슬퍼할 때 산새가 과일을 물어오고 개가 꿩을 물고 와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늘이 도와주는 효자였다. 손자 오진택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할아버지가 병이 들어 엄동설한에 생선회가 먹고 싶다고 하자 꽁꽁 얼어붙은 금강에 나가 어찌할 수 없어 슬퍼하자 큰 잉어 한 마리가 강에서 튀어 올라 할아버지께 해드렸으며, 아버지가 병환에 들자 손가락을 깨물어 아버지의 입속에 피를 흘려 아버지를 소생케 하는 등 효성을 다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자리에 영모재(영원히 사모하는)라고 하는 집을 짓고 종신토록 부모님 사모하였다고 한다.

문중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정려이지만 특정한 가문의 자랑이나 긍지로 국한할 것이 아니라 지역과 나라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부모에 대한 효도와 어른에 대한 존경심 함양 등 인성교육의 장소로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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