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핀 꽃
늦게 핀 꽃
  • 김순남<수필가>
  • 승인 2018.04.23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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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순남

꽃나무 한 그루가 발길을 붙잡는다. 유난히 봄이 더디게 오는 우리 지역에도 이미 목련꽃이 피었었다. 뭇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다 후줄근하게 시들어 이미 물러난 때이다. 아파트 뒤편 그늘진 곳에 묵묵히 서 있던 목련나무가 막 꽃 몽우리를 피우려 하고 있지 않은가. 지난겨울 혹독한 한파에 혹시 얼어버리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늦었지만 꽃을 피워 내는 모습을 보니 반가워 한참을 바라보았다. 꽃나무의 역할을 다하려고 무던히 견디며 따듯한 햇볕을 그리워했을 나무가 대견하다.

서울에 갔다 지인 S를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그녀와 나는 문학을 좋아하는 동기로 온라인카페에서 서로를 알게 되었다. 문학공부를 같이하게 되어 한동안 자주 만나며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녀는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지팡이에 의지해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걷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지천명을 코앞에 둔 여인이었다. 집 베란다에 재봉틀을 놓고 부업을 하면서 글을 쓰고, 독학으로 대입검정고시를 통과한 후 대학진로를 놓고 망설이는 중이었다.

그녀는 만학이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회복지 공부를 해야 할 것 같고, 좋아하는 국문학 공부도 제대로 해보고 싶다 했다. 막상 대학공부를 하자니 등록금도 적잖이 부담이 되어 수입되는 직장일도 병행하려고 하는데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 하였다.

아마 그때 나는 이런 권유를 한 것 같다. 날마다 등하교를 하는 대학보다는 방송대 공부는 온라인 수업이 많으니 다리가 불편한 그녀에게는 훨씬 부담이 덜 될듯하여 소개했다. 진로선정은 `해야 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공부'를 하는 쪽이 더 현명한 선택 같다고 이야기해주었지 싶다.

그 후 서로 바쁜 탓에 우린 자주 만나지 못했다. 간간이 그녀가 어떤 공부와 일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긴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오 년이 훌쩍 지난 오늘 그녀를 만나보니 결코 쉽지 않은 방송대 공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사회복지 쪽에도 관심이 있어 사이버 강의를 통해 자격증을 받았다니 그녀가 불편한 몸으로 얼마나 동분서주했을지 짐작이 간다. 모교 후배들을 위해 국어학, 맞춤법 강의를 해주고 있다며 특유의 환한 미소를 보여준다. 그녀의 도약은 그뿐만이 아니다. 오랫동안 잠자던 장롱 속 면허증을 꺼내 활용하는 중이란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가고 싶어도 못 가던 곳을 손수 운전해 다니니 일상이 즐겁다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오래전에 읽은 《아프니까, 청춘이다》 저자 김난도의 `그대라는 꽃이 피는 계절은 따로 있다. 다소 늦더라도 그대의 계절이 오면 여느 꽃 못지않은 화려한 기개를 뽐내게 될 것이다.'라는 구절을 생각나게 하는 그녀이다. 햇볕 한줄기 없는 그늘에서 목련이 제 본분을 다해 꽃을 피우듯이 그녀도 어려운 여건을 굳건히 떨쳐 내고 꿈을 이루어 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녀와 나는 일 년에 한두 번 얼굴을 보게 되는데 만날 때마다 내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온전한 몸을 가지고도 게으름을 피우는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 채찍질을 하게 된다. 앞으로도 피울 꽃들이 많은 이 계절, 나도 내 안에서 숨죽이고 있을 씨앗들을 깨워 보리라. 비록 늦게 필 꽃들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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