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에서 온 로빈슨
문명에서 온 로빈슨
  • 이영숙<시인>
  • 승인 2018.04.22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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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 이영숙<시인>

지난해 심어 놓고 수확하지 않은 해바라기가 들바람에 툭 떨어진다. 날 짐승들 머물다 가라고 웃는 얼굴로 꾸며놓았는데 알맹이가 다 빠진 걸 보니 그 역할을 다 한 모양이다. 금요일 저녁이면 작은 짐을 꾸려서 농막으로 들어가는 생활도 어느덧 일 년이 넘었다. 두 해 전, 집에서 이십 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작은 규모의 논을 사서 밭을 만들었다. 시골에서의 완전 정주는 어렵지만, 농작물도 직접 지어 먹고 이따금 들어가 쉴 곳이 필요했다.

초저녁이면 어슬렁어슬렁 내려와 꽥꽥거리며 우는 고라니,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북극성과 북두칠성, 백 미터 전방 도로를 네온사인 켜고 달리는 동화 같은 트럭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원시 세계로 들어온 느낌이다.

지난여름 농막 우물가에 세워둔 삽자루를 제집인 양 서성이며 맞서던 초록 사마귀, 푸성귀를 헹구던 함지박 밑의 왕우렁이, 고춧대 사이로 해먹처럼 거미줄을 엮어놓고 출렁이던 노란 거미, 꽃처럼 흩날리던 표범나비를 기다리며 트랙터가 갈아놓은 땅의 붉은 속살을 본다.

뽀송뽀송한 흙 위에 아이처럼 벌렁 누우니 마음이 평온하다. 천체를 보면 우리가 사는 지구라는 존재도 새롭게 다가온다. 땅속에서 `푸'하고 마치 사람이 숨을 내쉬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사람이 가장 편안할 때가 흙과 가까이 있을 때란다. 죽어서 썩은 부토와 흙을 비교하면 그 성분이 97%나 일치한다니 일리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수많은 아버지와 수많은 어머니가 돌아간 인류 탄생의 발원지에 어떻게 침을 퉤퉤 뱉겠는가. 신성한 조상들의 몸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인간도 완전한 자연물이다. 미국의 제14대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도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그 지역에 사는 인디언 추장에게 땅을 팔라고 했다. 그러자 시애틀 추장이 “반짝이는 개울물과 강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와 같다. 강물 흐르는 소리는 우리 조상의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 형제이며 꽃은 우리 자매이다.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팔 수 있나? 우리는 땅 일부분이며 땅은 우리 일부분이다.”라는 답장을 보냈다. 어쩌면 인디언 원주민들이 고차원적 인간이고 백인이야말로 야만적인 인간이다.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기존 견해를 바꾼 이야기이다. 원주민 방드르디, 즉 프라이데이가 서술하는 로빈슨 크루소는 아주 형편없는 야만 세계의 괴물처럼 그려진다. 이따금 들어와 전등불 밝혀놓고 원시의 밤을 소란하게 하는 우리도 문명의 괴물이다.

얼마 전 멧돼지가 내려와 수로 건너편 논둑에서 달려들 듯 노려보는데 움찔했다. 마치 우리 영역에 들어와 왜 문명 냄새를 피우느냐고 호통하는 눈초리다. 수로 폭이 넓어 건널 수 없는지 한동안 노려보다 그냥 인근 산속으로 들어갔다. 칠흑 같은 밤, 인가 없는 허허로운 들판 한가운데 서 있으면 정말 인간은 나약한 미물 같다. 물소리 새소리 들짐승 소리 독경처럼 흐르는 야생에선 인간은 동물의 상위개념이 아니라 그냥 이방 동물이다.

농사는 들짐승, 산짐승 먹을 것도 같이 지어야 한다는 어느 노시인의 말을 되새기면서 그저 인공의 냄새 줄이고 바람 한 줌, 비 한 줄금, 햇볕 한 자락 고맙게 받아 콩 한쪽, 호박 한 덩이 지으면서 조용히 잘 살다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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