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경제 흔드는 세습경영 폐해
나라경제 흔드는 세습경영 폐해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8.04.22 1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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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 권혁두 국장

`로마제국 흥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은 이렇게 주장했다. “인류사에서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 시기는 로마시대 도미티아누스가 죽은 이후부터 콤모두스가 즉위하기까지이다”. 로마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5현제(賢帝) 시대를 일컫는다. 96년부터 180년까지 84년간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 다섯 명의 스마트한 황제가 로마를 통치하며 증흥기를 이끌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혈연을 통한 세습황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반면 5현제 시대를 전후해 즉위한 두 명의 황제, 도미티아누스와 콤모도스는 세습황제였다.

도미티아누스는 베시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이자, 직전 황제인 티투스의 동생이었다. 형제가 부친으로부터 황위를 세습한 케이스였다. 그가 전쟁과 공포정치에 주력하다 암살당한 후 원로원이 추대한 황제가 네르바였고, 그가 5현제 시대의 서막을 연 것이다. 이후 4명의 황제는 제국을 발전시킬 최적의 인재를 물색해 양자로 들인 후 자리를 물려줬다. 혈족 세습이 아니라 공인과 검증을 받은 재목을 찾아 권력을 맡기는 발탁의 방식으로 황제를 뽑은 것이다. 이 합리적 관행은 5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인 아우렐리우스에 이르러 깨졌다. 황제의 친아들인 콤모도스가 권좌를 물려받은 것이다. 영화 `글레디에이터'에서는 콤모두스가 휘하 장수인 막시무스에게 자리를 물려주려던 부친을 살해하고 황권을 찬탈한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과 다르다. 콤모두스는 신을 자처하며 검투사 경기에 탐닉하다 암살당한다. 이후 로마는 유력한 장군들이 황제 자리를 주고받는 `군인황제시대'에 돌입하며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세습이 중단되자 번영이 시작됐고 세습이 재개되면서 침체에 접어든 것이다.

한 가문의 혈통에만 의존하는 리더 배출 방식의 치명적 위험은 정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20세기가 지난 대한민국에서 세습의 폐단이 새삼 논란이 되고 있다.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엽기적 갑질이 드러나며 대기업 세습경영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논란에 불을 댕긴 조현민 전무의 일상적인 직원 학대는 전문가들이 심각한 분노조절 장애로 진단하고 병원 치료를 주문할 정도이다. 자식들의 일탈만이 아니다. 회장에게 인사를 크게 한 죄로 면직된 직원에, 처음 본 회장 부인을 할머니로 불렀다가 회사를 떠난 직원도 있다고 한다. 밀수 의혹도 받아 일가가 관세청으로부터 자택 압수수색을 당했다. 통관 없이 사치품을 밀반입하는 과정에 직원들이 동원됐다고도 한다. 이들 가족이 타는 비행기의 부품을 다른 새 비행기의 부품과 교체했다는 믿기 어려운 폭로도 나왔다. 사주를 위해 승객 안전을 희생했다는 이 의혹이 사실이라면 항공사 문을 닫아야 할 일이다.

총수 일가의 횡포가 여론의 지탄을 받으며 대한항공은 주가 폭락으로 수천억원의 피해를 보고 있다. 대한항공의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의 손실은 국민의 피해로 직결된다. 자신들을 위해 헌신하는 직원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 봉건적 사고, 한 가지만으로도 대한항공 일가는 경영인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 카카오톡에 개설된 `대한항공 갑질 불법 비리 제보방'에는 나흘 만에 대한항공 직원 600여명이 참여해 갖가지 비리를 폭로했다. 직원 대다수가 벼랑에 몰린 경영인을 방어하기는커녕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조직이 깊이 병들어 있음을 방증하는 현상이다.

대한항공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기업이 장악한 대한민국 경제의 80%가 세습경영의 위기에 봉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않아도 우리 기업들이 인공지능이나 전기차 같은 미래산업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진단이 속속 나오는 판이다. 대한항공 사태를 보면 무능한 재벌 3세, 4세들이 창의적이고 도전적 경영으로 승부를 걸어야 할 글로벌 격량기를 헤쳐나갈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10대 그룹이 쌓아놓은 사내유보금이 515조원을 돌파했다. 사회는 최저임금조차 수용하지 못해 홍역을 치르고 있지만 재벌들은 투자보다 제 집 곳간 채우기에 열중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글로벌 전략보다 당장 돈이 되는 국내시장 곳곳을 공략하는 문어발 전략에 몰두한 결과이기도 하다. 능력을 검증받은 전문 경영인이 운전대를 잡게 하는 대기업 지배구조 개선은 무엇보다 국가경제의 장래를 위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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