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 봄비
산속 봄비
  • 김태봉<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18.04.1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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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흔히 봄을 소생의 계절이라고 일컫는다. 꽁꽁 얼었던 대지에서 파랗게 싹이 돋아나고 메말랐던 나뭇가지에도 새 잎이 자라난다. 부쩍 따뜻해진 날씨 덕이기도 하지만, 봄비를 빼놓고 소생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 번 맞았다 하면 무엇이고 돋아나고 피어나는 마법을 지닌 봄비를 청(淸)의 시인 대희(戴熙)는 산속에서 맞이하였다. 그것도 아무도 없는 텅 빈 산속에서 말이다.

공산춘우도(空山春雨圖) / 대희(戴熙)

空山足春雨(공산족춘우) 아무도 없는 산에 봄비 흠뻑 내리니
緋桃間丹杏(비도간단행) 주홍빛 복사꽃 사이로 붉은 살구꽃 보이네
花發不逢人(화발불봉인) 꽃은 피었으나 사람을 만나지 못해
自照溪中影(자조계중영) 스스로 시냇물에 그림자 비추어 보네


 시인의 거처는 산속이다. 무슨 이유로 산속에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번다한 세사(世事)를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온종일 사람 하나 볼 수 없기에 시인이 사는 산은 빈 산(空山)이다. 여기서 비었다는 것은 사람이 특히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이 없다는 뜻이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인위(人爲)는 없고 자연만이 존재하는 공간이 빈산이다.

봄을 맞이하여 비가 풍족하게 내리는 것도 자연이요, 이에 맞추어 꽃들이 피어나는 것도 자연이다. 넉넉히 내린 봄비, 주홍빛 복사꽃, 붉은 살구꽃 이 세 가지만으로도 빈 산은 이미 빈 산이 아니다. 비기는커녕 뭔가 가득한 느낌을 주고도 남는다. 이러한 느낌은 시인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 것인데, 시인은 그만큼 산속 생활에서 평화로움과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리라. 마음이 평화롭고 여유로우니, 자연을 대하는 시인의 눈도 참으로 따뜻하고 다정다감하다. 봄비 뒤에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서 피어난 꽃들과 반갑게 눈을 맞추고 인사를 건네며 다녔다. 그러다가 계곡에 이르러 물가에 핀 꽃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꽃에 대한 시인의 반응이 참으로 흥미롭다. 나름으로는 예쁘게 피었지만, 보러 오는 사람 하나 없고,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보러 온 사람이 되어 연못에 비친 자신을 봐주며 예쁘다고 감탄해 준다는 시인의 발상은 재치와 여유가 넘친다.

봄비는 만물을 소생시키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번잡한 도시에서 봄비의 위력을 느끼기 어렵다면, 산속에 가보기를 권한다. 봄비 한 방에 없던 꽃이 보이고 싹이 나타나는 것을 직접 목도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산속인 것이다.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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