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길
봄길
  • 이재정<수필가>
  • 승인 2018.04.11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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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이재정

저만치 웃으며 봄이 오고 있다. 미소를 살짝 머금고 꽃샘바람을 가르며 온다. 금방이라도 함박웃음을 터뜨릴 듯이 볼이 잔뜩 부풀어 올라 있다. 곧 황량한 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기적을 불러올 것이다.

“봄에는 사뿐히 걸어라. 어머니 같은 지구가 임신 중이니”이 글귀는 어느 연예인의 타투에서 보았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모든 생명이 깨어나는 봄의 지구는 생명체를 잉태하고 있는 어머니다. 혹여 시끄러우면 놀라니 발걸음조차도 조용히 해야 한다. 경이로운 새로운 탄생을 숨죽이고 엄숙하게 지켜보아야 한다는 인디언 속담이다.

봄은 조용하다. 안에서는 분주해도 겉으로는 평온하다. 땅속 깊이로부터 뿌리는 힘껏 물을 빨아올려 줄기로 보낸다. 수관을 채운 줄기가 가지 끝까지 물을 밀어올린다. 잎눈이 나오는 자리가 가려운 나무는 몸서리를 쳐도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뿌리를 더 깊이 박으며 땅속을 오르는 싹도 용을 쓰지만, 밖으로 고함을 내지 않는다. 속으로 앓으며 10개월을 견뎌내는 영락없이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나무에서는 새순이 실눈을 뜨고 땅 위에선 흙을 밀어올리느라 사투를 벌이며 새싹이 올라온다. 이즈음의 초록은 어느 것 하나 예쁘지 않은 것이 없다. 추위를 견뎌내고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주는 것 중에 대견하지 않은 것도 없다. 키를 키운 풀이 후에 모두로부터 구박을 당할지언정 지금은 다 곱다. 세상의 눈을 뜬 생명은 하루하루가 다르다. 넓은 잎이 되기까지는 잠깐이다.

꽃들도 순식간에 전염된다. 기침을 해대면 옮는 감기 같다. 남쪽으로부터 꽃소식이 전해지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방으로 번진다. 하얀 송아리가 죽은 듯이 보이던 나무에 일제히 보석처럼 빛을 낸다. 벚꽃처럼 사람들을 단번에 휘어잡는 꽃도 없다. 인파로 온 세상이 출렁인다. 진한 향기로 유혹한 것도 아닌데 이맘때만 되면 사람들은 꽃의 향연에 환장한다. 꽃잎이 절정에 이르면 번식을 위하여 꽃가루를 날린다. 콧노래를 불러야 할 아름다운 계절에 콧물을 흘리고 피부가 가려워 고통스러운 이들도 있다. 코가 간질거리고 재채기도 난다. 안간힘으로 피워낸 꽃송이를 거저 보는 사람들에게 알레르기라는 독소로 뿜어대는 게 아닐까 싶다. 심술이 났던 게다.

언제부턴가 나도 꽃이 피면 봄 알레르기를 앓는다. 마음이 설레어 간지러움을 탄다. 쏟아지는 햇볕이 고맙고 순한 바람이 좋아지는 건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다. 해마다 찾아오는 봄을 가슴으로 안는다. 갈수록 이 계절이 애틋하여 미칠 것만 같다. 나는 꽃 한 송이 꽂은 채 정신 줄을 잠시 놓고 들판으로 쏘다니는 상상을 즐기곤 한다. 봄처녀가 되는 발칙한 순간이다.

벚꽃나무는 봄에만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꽃이 지고 나면 그 많던 이들의 눈길은 온데간데없다. 화려했던 시간은 가고 외로워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묵묵히 보내야 한다. 한철 피워낸 꽃으로 나머지 일 년을 외면당하며 기꺼이 살아간다. 나도 한때 피워준 사랑, 그 추억만으로 평생을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닳아지지 않는 신비한 기억이다. 들추고 들추어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켜다.

그가 봄길을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다. 그대가 되어 성큼성큼 내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심장이 `쿵'내려앉았다. 마음에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이건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나고 있음이다. 자각몽(自覺 夢)임을 알아차린 나는 꿈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려고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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