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 미인
대추 미인
  • 김기자<수필가>
  • 승인 2018.04.1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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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기자

장날이다. 길가의 트럭에 소복이 쌓인 대추가 눈길을 끌고 있다. 목청을 높이는 주인의 모습이 정겨워서 다가갔다. 일단 시식을 해보라는 말에 넙죽 받아 입으로 넣었다. 달콤하다. 두말도 않고 값을 치른 후 대추를 받아 유유히 빠져나왔다.

집에 와서 보니 더 흐뭇하다. 원래 대추는 생과生果일 때도 맛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말려서 먹는 일에 익숙하고 또 보관하기도 편한 것 같고, 잘 사들였다는 생각을 한다. 일단은 하루에 몇 개씩 그냥 먹기로 했다. 요즘은 재배과정이 발달하여서인지 대추가 크기도 하거니와 맛도 일품이다. 비타민 c가 사과나 복숭아보다 백배는 높다고 하니 더욱 놀랍다. 그 밖에 여러 효능에 대해서도 설명이 모자랄 뿐이다.

쭈글쭈글 말라비틀어진 대추를 먹으며 문득 누군가가 떠올랐다. 가끔 리어카에 갖가지 채소를 싣고서 팔러오는 이웃마을 할머니의 얼굴이다. 연세로 따진다면 엄마뻘쯤은 된다. 오래전부터 우리 집에 드나들던 분이라 한동안 보이지 않으면 궁금키까지 하다. 갑자기 그분의 얼굴과 왜 대추가 비교되는 걸까.

나는 그분을 대추 미인으로 칭하고 싶다. 나이가 팔십을 넘었는데 그분은 여전히 현역이시다. 그동안 틈날 때마다 주고받은 이야기들이 좋은 기억으로 그분을 마음속에 붙들어 두었지 싶다. 고령의 나이에도 한껏 자기만의 몫을 감당하며 사는 모습이 내게는 귀감이었다. 경로당 같은데 가는 것보다 이렇게 푸성귀를 팔아서라도 용돈을 마련해 쓰는 것이 즐거움이라는 밝은 음성이 귓전에 남는다. 또 옆구리에 보관한 쌈짓돈을 꺼내어 손자들에게 줄 때 행복하다는 얘기마저.

그 모습이 진솔한 삶의 향기였다. 얼굴은 주름지고 몸은 마른 가지처럼 휘어졌어도 그분의 심성이 대추가 지닌 이로움처럼 귀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일하는 것이 즐거움이라면서 건강이 허락될 때까지 하겠노라는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셨다. 지금껏 그 말이 내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왠지 뵙기가 힘들다. 늘 하던 말씀대로 만약에 몸이 아프면 모아둔 돈으로 양로원에 가겠다더니 혹시 그렇게 된 것은 아닐는지.

우리는 누구나 늙을 수밖에 없다. 우선 얼굴에 나타나는 주름이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표현해준다. 노화를 피하려는 갖가지 몸부림을 주변에서 볼 수 있는데 성형을 한다거나 다른 방법을 동원해 젊음을 붙잡고 싶어 한다. 그래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우선 마음에서부터 나타나는 그림자가 아닐까 싶다. 그것은 아무리 나이가 깊다 해다 해도 밝은 표정이리라. 자신에게 감당되는 삶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는 그런 마음의 자세를.

나 역시 노화가 친구 같은 모양으로 곁에 다가와 있다. 그럴지라도 내가 이름 지은 대추 미인같이 삶을 긍정적으로 꾸려가고 싶다. 그분이 지니신 주름진 얼굴에서 건강한 내면의 세계를 솔직하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러보니 주변에 의외로 대추 미인이 많기도 하다.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대추의 맛처럼 마지막 인생이 향기롭게 다가온다. 열심히 건너온 세월의 강이 얼굴 위로 잔잔하게 흘러가고들 있다. 특별히 온화한 풍경이다. 그 모습에서 백세시대의 자화상을 미리 그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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