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풀과 나무들에게
봄, 풀과 나무들에게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8.04.1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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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봄이 좋기는 우선 만발한 꽃들에게서 얻는 기쁨 덕분이리라.

꽃눈 속에 웅크리고 있던 꽃망울이 일제히 벌어져 사방천지가 환하게 번질 때 사람들은 춘흥에 겨워 집안에 머물지 못한다. 하얗고 노란, 그리고 연분홍이거나 보랏빛으로 치장한 꽃들이 몸을 열어 지상의 바람과 천상의 푸른 하늘, 빛나는 햇살과 만나는 것은 끊어지지 않고 세계를 이어가려는 안간힘이다. 일찌감치 꽃눈을 열어 세상의 눈길을 끌고, 그렇게 끌어 모은 눈길을 통해 암술과 수술이 만나는 장엄한 잉태를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는 피나는 열정이 있다.

꽃은 이러한 비장함으로 더 아름답다.

봄날 만발한 꽃들을 좋기의 우선으로 꼽는 이들이 대부분이겠으나 나는 꽃들만큼 푸른 잎들을 사랑한다.

“봄바람을 타 새 움과 어린잎이 돋아나올 때를 신록의 유년이라 하면, 심복염천(三伏炎天)아래 울창한 잎으로 그늘을 짓는 때를 그의 장년 내지 노년이라 하겠다. 유년에는 유년의 아름다움이 있고, 장년에는 장년의 아름다움이 있어 취사(取捨)하고 선택할 여지가 없지마는, 신록에 있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이즈음과 같은 그의 청춘시대 - 움 가운데 숨어 있던 잎의 하나하나가 모두 형태를 갖추어 완전한 잎이 되는 동시에 처음 태양의 세례를 받아 청신하고 발랄한 담록(淡綠)을 띠는 시절이라 하겠다.” <이양하. 신록예찬> 고등학생 시절 국어시간에 배운 수필을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피고 지고, 또 피고 지는 일을 무수히 반복하는 나무들처럼 내게도 수많은 인생 역정과 우여곡절 개인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리라.

사시사철 푸르른 상록수를 제외한 갈잎떨기나무의 종류에 속하는 대부분의 나무는 힘겹게 새순을 키운 뒤 깊은 가을이 되면 모든 잎들을 제 몸에서 떨군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로 시작되는 유치환의 시 <깃발>을 읊을 때마다 나는 모진 삭풍이 몰아치는 겨울의 빈 들판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바람에 나뭇잎이 남아 함부로 휘날릴 때, 추위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더 커질까 상상하며 빈 나무들을 고마워한다. 그리고 비워둔 가지 사이로 겨울의 하늘을 내어주고,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을 숨김없이 대지로 나누어 주는 나무들이 대견하다.

그리고 긴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나무는 여리고 연한 연두색으로 새 잎을 내보내면서 우리에게 살아 있음과 더 잘 살아갈 수 있음의 기쁨과 희망을 확인시켜 준다. 그런 빛깔이 내가 나무의 여러 색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뭇잎들은 심술궂은 꽃샘추위와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주저 없이 성장하며 하루하루가 다르게 풍성하게 모습을 바꾼다. 어제 겨우 움을 틔운 은행잎들이 며칠 사이 제법 녹색의 빛깔을 띠면서 크기도 훌쩍 커졌다. 노랑병아리가 순식간에 솜털을 갈아입는 듯하다. 이제 시샘할 수 없는 봄날이 이어지면서 나뭇잎들은 서로 앞다투며 무성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무는 다시 기세등등한 태양의 따가운 눈길을 피할 그늘을 우리에게 만들어 줄 것이고, 올려다보기 힘겨운 눈부신 하늘을 가려주는 대신 스스로의 양분은 마음껏 섭취하는 공생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힘껏 대지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큰 나무 밑 노란 민들레.

자세히 들여다보니 귀화식물로 알려진 서양민들레이다. 순간에 꽃을 꺾어버리고는 이내 깊은 후회를 한다. 사람이거나 풀과 나무, 세상의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 가운데 자기가 사는 장소와 환경을 제 스스로 선택할 자유가 얼마나 있겠는가. 꽃 지고 홀씨 되어 허공을 둥둥 떠다니던 민들레에게 서양과 토종의 경계와 차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봄. 꽃과 나무에게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며 그다지 절실하지 않은 언어와 생각이 뒤덮는 세상.

몇몇 건물을 뒤덮은 구호와 특정한 색깔의 옷들이 거리를 난무하며 선택을 강요하는 봄. 번뇌와 고민은 오로지 인간의 몫인 4월. 바람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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