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 장군 묘소를 찾아
강감찬 장군 묘소를 찾아
  • 박재명<충북도 동물방역과장>
  • 승인 2018.04.10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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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박재명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이 오고 찬바람이 일었다. 그러나 세월의 시간은 바꿀 수 없는 것. 이내 훈풍은 불었다. 3,4일 만에 봄꽃들이 무수히 피어났다. 산수유가 피고 목련꽃 피더니 벚꽃 개나리 살구 복숭아가 경쟁하듯 꽃을 피웠다. 휴일 아침 회의가 끝나고 봄바람에 이끌려 벚꽃 가득 핀 야외로 달려갔다. 지금의 상황을 출옥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잠시 허용된 외출이라고 할까? 휴일임에도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 짧은 시간 의미 있는 곳이 어딜까 생각하다 가까운 옥산으로 방향을 잡았다. 옥산면 국사리에 강감찬 장군이 영면하고 있는 묘소가 있다. 꽤 오래전에 알았지만 가까이 보지는 못했던 터라 답사하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한국 전쟁사의 3대첩은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이라고 한다. 그 중 귀주대첩이 없었더라면 북방의 강동 6주는 지금 중국 영토가 되었을지도 모를 중요한 전쟁이었다. 귀주대첩으로 승리를 이룬 고려의 명장 강감찬 장군의 묘소가 우리 고장에 있음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강감찬 장군은 원래 서울 봉천동 태생이었다. 무슨 연유로 묘소를 이곳에 정하였는지는 찾아보았지만 아쉽게도 명료한 자료를 찾기 힘들었다. 1963년 국사리에 전설처럼 구전되는 이야기를 근거로 한 교육자가 탐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이 지역의 지명이 `국사리'임을 보면 장군의 묘소와 무관치 않다고 생각했다.

이곳이 장군의 묘소라는 단초는 지역의 사림 유지들이 분묘 앞 돌무더기에서 당시 정삼품 이상 고관의 묘지에만 세우던 인상석(人象石)을 찾아낸 것이 계기가 되었다. 장군은 생전에 천수현 천수남(天水男), 천수후(天水候) 작위를 받아 각각 식읍(食邑) 300호와 1000호에 봉해졌다고 알려졌는데, 지금 옥산면에는 천수천(天水川)이 있는 점 등을 종합하였고, 당시 김성균 국사편찬위원회장 등 학자들의 판단 하에 최종 확인하였다고 한다. 이에 1968년에 청주교육장이 추모비를 세웠고, 1969년에는 이 지역 사림 유지들의 노력과 당시의 김효영 충북 도지사 등 기관단체에서 부지 매입과 하천부지를 제공받아 충현사를 건립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또한 신라 학자 최치원의 계원필경에 따르면 오송은 삼한의 부국강병을 꿈꾸던 곳이었으며, 5그루의 소나무를 심은 것이 오송(五松)의 유래라고 한다. 강감찬 장군이 오송 병마산(兵馬山) 기슭에서 말과 군사를 훈련하고 양성하였다고 하니 오송과 오창은 귀주대첩과 무관치 않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흥화진은 서희가 거란과 담판하여 강동6주를 확보한 후 구축한 압록강 방면의 전쟁 요충지이다. 그러나 고려는 중국의 정권교체기에 거란과 외교적 마찰로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1017년 8월에 거란의 2차 침입 시 흥화진에서 장군의 지휘 아래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다. 올해가 바로 천 년이 되는 해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거란은 이듬해 또 침공하였으나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적을 궤멸시켜 귀주대첩의 공을 세웠다. 그러니 올해가 999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기도 하다.

지금 옥산면 국사리 강감찬 묘소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봄날이다. 전쟁의 상흔은 없고 온갖 봄꽃들이 피어나는 평화로운 전경이다. 상춘의 계절 4월에 장군의 얼이 깃든 옥산으로 나들이해 보면 어떨까? 장군의 탄생지인 낙성대만큼 묘역과 충현사를 더욱 성역화하면 어떨까? 장군의 위업을 기리고 지역민의 자긍심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어느 봄날 짧은 나들이의 소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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