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마의 전생시대
할마의 전생시대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8.04.0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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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최명임

비애라면 아프고 노동이라면 괴롭다. 당당하게 전성시대라 말하고 싶다. 할마와 할빠는 사회상황이 빚어낸 신조어이다. 할머니와 엄마의 합성이고, 할아버지와 아빠의 합성어다. 인생의 지혜와 육아의 다양한 경험으로 이 나라의 미래를 키우고 있는 노장들이다. 취미 생활이나 하고 여행을 다니지 손녀 손자를 키워주는 할머니를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타박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할마, 할빠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난 이유는 분명 알고 있을 거다. 이 중요한 일이 퇴역한 노장들의 몫이라면 당당히 해내어야 하지 않겠는가.

실은 힘에 부치는 노동이다. 의무는 아니니 때로 물러나고 싶다. 시간을 오롯이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살림에 육아 부담이 가중되면 우울증과 비애를 느끼기도 한단다. 하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상황이라면 할마들은 대개 선택의 여지가 없다. 얼마 전 그런 할마 할빠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는데 기대를 해보아도 좋을까.

우리 할마 할빠들이 지난 세월 얼마나 큰일을 해내었는지, 지금도 해내고 있는지, 그 힘이 얼마나 사회에 큰 공헌을 하는지 생각해보라. 그러면 어제 뉴스 한 부분을 차지했다가 사라져버린 기사로는 부족할 것이다. 그들은 대한민국을 지금으로 일구어 놓고 쉬어야 할 나이에 역전의 용사처럼 다시 뛰는 것이다.

그런 세월이 8년이다. 부산한 아침을 몰고 집을 나서면 학교 앞에는 아이들 반 어른반이다. 할마와 할빠가 대부분이고 젊은 엄마, 간혹 아빠도 섞여 있다. 십리 길을 걸어 언니 오빠 손을 잡고 학교에 다니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는데 세월 따라 변하는 풍경이 한두 가지랴.

허리 구부정한 할빠가 손녀와 주먹인사를 하고 있다. 갓 피어난 고사리손과 온 인생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달려온 역전의 용사가 노장의 모습으로 어린 손녀와 주먹을 맞대고 있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의 빛나는 조합이 참으로 아름답다. 쭈뼛거리는 손녀 손을 잡고 기어이 교문으로 들어선다. 손녀의 손을 잡고 내가 따르고, 뒤로는 6층 할마가 손자의 신발주머니를 들고 따른다. 신호등 건너 급히 걸어오던 할마 할빠의 발걸음이 느려지고 신호등이 바뀐다. 아이들이 저들의 세계에 입성하고 나면 돌아서는 마음이 짠하다. 어미가 아닌 할마라서 아이들 또한 마음의 부담이 왜 없을까.

무거운 짐을 부린 듯 할마, 할빠의 걸음이 노곤하다. 이 순간 제 어미 아비는 삶의 현장에서 땀이 나도록 열심히 뛰고 있을 테지. 이 어미를 믿고 마음 편히 일을 하겠거니 하는 뿌듯함에 나는 행복하다.

그제서야 눈을 돌리면 학교 옆 매화나무가 연분홍 주둥이를 쏘옥 내밀고 종알거림이 푸지다. 그 예쁜 입술을 톡톡 건드려 보면 멈추지 않는 손녀들의 종알거림이 들린다. 숨 가쁜 아침을 학교에 내려놓고 오롯한 여유를 맞보며 돌아온다.

나는 과거이다. 나의 아이들은 현재이며 그 아이의 아이는 미래이다. 그러니 나는 대단한 현재를 키워 내었고 미래를 위해 다시 분발하는 것이다. 다음 세상이 되어 줄 미래, 이 막중한 책임을 지혜롭게 감당해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쉴 새 없는 저 종알거림에 내 수고를 보태어 언젠가는 큰 울림의 언어로 터져 나오길 소망한다. 할마는 나의 또 다른 호칭, 나는 현재와 미래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

이는 분명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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