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아픈 침묵
너무 아픈 침묵
  • 류충옥<수필가·청주경산초 행정실장>
  • 승인 2018.04.0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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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 류충옥

가장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우리나라 여행지, 으뜸은 제주이다. 낮은 돌담 너머로 푸른 바다가 보이고 유채꽃과 동백꽃이 조용히 피어 있는 곳. 평화의 땅으로만 보였던 제주. 그러나 그 속에 깊디깊은 상처를 안고 있었다. 작년 여름 4·3 사건의 현장에 발을 디뎌 본 후 비로소 알게 됐다.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삼일절 행사가 있던 날, 기마경찰이 어린아이를 말발굽으로 치고 그냥 달아났다. 이에 사과를 받으러 쫓아가는 민중을 향해 경찰이 발포해 6명 사망, 8명이 크게 다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분노한 주민은 물론 공무원까지 나서서 총파업을 감행했다. 이를 미군정은 좌익의 배후조종에 의한 빨갱이 폭동으로 간주한다. 친일파 경찰을 등용하고 서북청년단을 끌어들여 제주도민을 대량 검거 학살한다. 4·3 사건의 서막이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호소문을 발표했다. 경찰과 우익 청년단의 탄압에 저항하고, 통일국가 건립을 가로막는 5·10선거를 반대하며 외세에 저항한다고 외쳤다. 제주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5·10 단독 선거를 거부했다. 선거 후 미군정은 제주도 민중을 무차별 탄압했다. 게다가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까지 선포한다.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해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토벌대와 무장대의 격돌 속에서 2만5000명에서 3만명의 무고한 주민이 1954년 9월 21일까지 희생되었다. 제주 전역은 피로 물들었다.

조천면 북촌리는 한 마을 전체의 제삿날이 같다. 1949년 1월 17일 북촌 초등학교 마당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그리고 무차별 학살이 자행됐다. 450여명이 죽임을 당했다. 마을은 모조리 불태워졌다. 이후 이곳은 무남촌으로 불린다. 남자들의 씨가 말랐기에 어린 남아들은 청소년 때부터 어른 노릇을 해야만 했다.

빨갱이로 낙인찍힐까 두려워 제사도 숨죽여 지내야 했던 세월이었다. 붉은 자국을 지우고자 6 ·25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더 마음 편한 일이었다면, 70년 동안 숨겨야만 했던 아픔과 슬픔을 누군들 짐작이나 하겠는가?

월령리 선인장 마을로 들어가면 돌담으로 쌓인 집이 있다. 진아영 할머니는 총탄에 턱이 날아가 평생 턱이 없이 살다가 2004년 돌아가셨다. 음식을 씹지도 못하니 늘 소화불량에 시달려야 했고, 남 앞에서 음식을 먹을 수도 없어 바깥출입도 않고 평생을 무명천으로 턱을 가리고 살아 ‘무명천 할머니’로 불렸다.

제주 4·3 사건은 6·25 동족상잔 비극의 서문과도 같았다. 단일 민족인 우리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를 억지로 만들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차별적 학살을 했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 올해로 제주 4·3 사건이 70년이 되었다. 너무 아픈 상처는 울 수조차 없다. 그래서 평화로 포장하며 침묵으로 견뎌야만 했던 아픔의 시간.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무고하게 죽어간 수많은 넋을 70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달래줘야 하지 않겠나? 상처를 달래고 응어리 푸는 해원(解 )이야말로 동족 화해 희극(喜劇)의 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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