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람 우암(7) 재조지은
큰 사람 우암(7) 재조지은
  • 강민식<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 승인 2018.04.0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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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 강민식

사문난적 윤휴의 죽음 이후 주자학 일변도의 흐름은 굳건해졌다. 직후 <사변록>을 지은 박세당이나 <예기유편>을 지은 최석정마저 사문난적이라 배척하니, 주자와 다름은 곧 이단(異端)이었다. 다른 붕당에 대한 압박 수단이었으니, 조선 후기의 색깔론이다.

중국 남송 때 완성된 성리학은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의 준말로 곧 의리를 밝히는 학문이다. 조선 개국을 도모했던 이들도 고려의 신하라는 한계를 춘추대의론으로 역성혁명을 합리화했다. 한편 또다른 의리론으로 절의를 지킨 사림들이 정계에 진출하며 붕당론으로 주자학을 실현했다.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는 곧 삼전도의 치욕을 정신적으로 극복하는 길이었다. 이제 ‘대명의리’는 곧 재조지은, 재조번방이라 일컫는 조선을 다시 세운 은례였다. 명이 멸망한 후 오랑캐의 나라 청과 대척점에 둘 수 있는 조선은 중화의 나라였다. 하지만 감히 정통을 자처하지 못하고 소중화라 불렀다.

‘그’의 고향은 옥천 구룡리이다. 도처에 널린 아홉 산줄기를 뜻하는 명당 구룡(九龍)이다. 구룡을 품고 1606년 태어났다. 증조대에 청주에 자리 잡은 후 아버지는 선산 곽씨 처가로 장가들었다. ‘그’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곳에는 후대 유허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그런데 보다 작은 한 칸 기와집, 정려가 나란히 있다. 바로 외할아버지 곽자방(郭自防)의 충신 정려이다. 기와집의 격이 다르다.

외조 곽자방은 중봉 조헌을 따라 금산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조헌은 임진왜란 때 서인(西人) 중 독보적인 의병장이었다. 청주성 탈환 후 호남 의병장 고경명과의 약속, 호남을 넘보던 왜적을 막다가 7백 의사와 함께 순절하였다. 전통시대 충(忠)의 전형을 보였다. ‘그’는 외조와 함께 순절한 조헌을 공맹과 정주(程朱)를 배워 죽음으로 선도(善道)를 지킨 군자라 하였다. 의사(義士)의 극치라 평했다.

위로부터의 무능에서 촉발된 임진왜란은 명의 파병으로 전황을 돌릴 수 있었고, 수많은 민초들의 저항, 그리고 수군의 용전으로 전란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종전 후의 상황은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왕은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한 장수들에 대한 포상에 인색했고, 반면 함께 의주로 피난한 이들에 대한 후의는 넘쳤다. 게다가 의병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는 호남 의병장 김덕령마저 혹독한 고문으로 죽게 만들었다. 왜군이 한양을 20일 만에 점령한 것도 수령들이 왕을 배신하여 앞장섰기 때문으로 돌리기까지 하였다.

선조의 독선과 광해군의 실정, 뒤이어 반정으로 집권한 서인 세력은 조헌에 대한 재평가 작업에 돌입했다. 또한 명나라의 원병은 이제 대외정책을 결정 짓는 등대였다. 명나라는 전쟁이 중국으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여 원병을 보냈지만, 이제 명나라는 조선에 있어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몰락하는 명, 새로이 신흥 강자로 떠오르는 청 사이에서 조선의 선택은 의리였다.

살아있는 명나라 장수마저 제향을 올리던, 곳곳에 친명반청의 기치가 모든 것을 지배했다. 하지만 결과는 다시 정묘, 병자호란의 수모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또 조선을 지배한 대명의리론은 강고해 갔다. 권위 잃은 조정과 공허한 의리론 속에서 수많은 충신, 전란 속에 부모를 구한 효자, 정절을 지킨 여성은 창조되었다. 중국 밖에서 명 황제를 제사지낸 사실은 독보적이다. 그리고 외조에서 형제에 이르는 순절을 겪은 한 사람이 거기 중심에 서서 조선 후기의 이데올로기를 주도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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