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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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명애<수필가>
  • 승인 2018.04.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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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박명애<수필가>

봄이 돌아왔다. 산기슭 자드락길에 푸른 싹이 돋고 꽃다지, 민들레, 냉이, 씀바귀도 파릇하다. 딸아이는 모여 난 망초 싹을 보며 귀엽다고 쪼그리고 앉아 손끝으로 톡톡 잎을 건드렸다. 바쁜 서울살이가 만만치는 않을 터. 풍경을 눈에 담는 아이의 애잔한 등으로 오후 햇살이 눈 부셨다.

“그립다. 무심천”

딸애의 입에서 무심코 흘러나온 한마디가 가슴에 콕 박혔다.

“지금 가보면 되지.”

예약해둔 버스 탑승시간까지는 두어 시간 여유가 있었다.

무심천에는 어느새 벚꽃이 만개했다. 엊그제만 해도 발롱거리던 꽃망울들이 이상고온에 화라락 피어버렸다. 딸아이는 여섯 살 때 사진을 찍었던 나무를 기억해 냈다. 그 사진 속 포즈를 재현해내며 생각나느냐고. 팔짱을 끼고 걸으며 가물가물 흐릿해진 순간들을 불러내는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어느새 아이에게도 무심천은 그리운 곳이 되었나 보다.

나무 아래 바위에 나란히 어깨를 기대고 앉아 말없이 풍경을 응시했다. 마른 갈대숲 너머로 노란 개나리꽃이 이국 풍경처럼 생경했다. 잠시의 고요 속으로 따릉거리며 자전거를 탄 소녀들이 들어왔다. 왁자지껄하며 소란스럽게 다가왔다 멀어지는 아이들 뒷모습을 보려니 어린 날의 내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버드나무 길을 따라 연두 물이 수채화처럼 번지는 봄이면 친구들은 자전거를 타고 무심천으로 나왔다. 보수적인 부모들은 아직 중학생인데도 말만 한 처녀들이 자전거를 탄다고 몹시 싫어하셨다. 덕분에 아버지나 오빠 자전거를 몰래 타고 나온 무용담들은 다양하게 변주되며 즐거운 수다거리가 되었다. 미호천까지 한 줄로 줄지어 달리며 깔깔대던 기억들. 낭창거리는 버드나무 아래를 스칠 때마다 짧은 순간 흰 셔츠 위로 가물거리던 그림자,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시원하게 드러나던 친구의 목덜미, 그 위로 쏟아지던 봄빛. 눈물 날만큼 아름다운 추억이다. 자동차가 지나면 구름처럼 일던 흙먼지에도 맑게 퍼지던 동무들의 웃음소리 가득했던 길. 버드나무 홀씨가 눈병을 유발한다는 민원에 지금은 벚나무로 대체되었지만 흰 꽃 사이 드문드문 유연하게 늘어진 버드나무를 보면 언제나 지나간 풍경들이 살아난다. 행복한 순간도. 아픈 기억도 모두 오래 삭아 그리움이 된 풍경들.

그리운 곳이 남아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삶이 고단할 때 마음이 아플 때 그곳은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최근 이슈가 되었던 영화 <리틀 포레스트>. 도시에서의 삶이 버거워진 주인공은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으로 돌아온다. 온전하게 혼자 남겨진 그녀는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자신의 고민과 마주하고 관계에서 온 상처들을 치유하게 된다. `혜원이가 힘들 때마다 이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라는 대사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어쩌면 이곳 무심천은 딸애에게도 내게도 그런 곳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 공유한 시간이 섞여 있는 곳. 바람과 햇살. 그리고 온기가 기억으로 남아있는 곳. 언제든 돌아오고 싶은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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