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풍경
오래된 풍경
  • 정명숙<수필가>
  • 승인 2018.04.02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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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정명숙

낡은 건물이다. 마당가의 향나무가 굵은 몸통으로 지난 세월을 말한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청색 기와지붕과 흰색의 외벽은 회색빛에 가깝다. 출입문 위에 나무로 된 작은 간판이 촌스럽게 걸려 있다. 지역에 걸맞게 이름을 붙인 것도 아니다. 그냥 다방이다.

주차장은 흙 마당이라 편안하다. 외관상 보이는 모든 것들이 순박하고 정답다. 누구라도 안으로 들이는데 인색함이 없어 보인다. 시골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다방은 그렇게 발길을 멈추게 한다.

처음으로 친구와 교차로다방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의 두근거림을 기억한다. 분 냄새를 앞세우고 중년의 남자들 곁에 앉아 농을 치던 한복차림의 가호마담과 양장의 레지는 생소했다. 눈길이 자꾸 그들에게 갔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음악을 들으며 멋진 남자의 담배 피우는 모습이 하도 근사해 몰래 훔쳐보다가 깜박 죽을 것 같은 사랑을 만나고 가슴쓰린 이별도 해보고 싶었다.

오지랖 넓게 친구가 애인을 만날 때 같이 가고 이별할 때는 건넌 편 자리에 앉아 아픈 시간을 함께 겪었던, 젊은 날의 추억 한 페이지를 펼치면 낭만의 장소로 다방이 먼저 떠오르고 반가워지는 이유다.

그야말로 옛날다방을 상상했던 실내풍경이 아니다. 시멘트블록을 쌓아 그 위에 헌 집에서 뜯어낸 손잡이가 달린 문짝을 얹어 차탁을 만들었고 레자를 씌운 푹신한 의자가 아니라 중고품 식탁의자다. 테라죠(도끼다시)바닥은 때가 끼어 제 색을 잃었으니 신발이 더러워도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

천정은 배관으로 어수선하고 장식 없이 시멘트가 그대로 보이는 벽은 민 낯이다. 여러 개의 가로줄이 끊임없이 흔들리는 흑백텔레비전이 오래된 풍경을 강조하는 유일한 장식품이랄까. 의도적으로 꾸민 실내는 불편하고 어색하다.

커피 값은 시내 중심가에서 마시는 것보다 높다. 애당초 가호마담이나 레지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황금비율의 달달하고 구수한 커피를 머그잔이 아닌 커피 잔으로 마실 수 있는 다방 풍류를 즐겨보자는 기대만 있었다.

테이크아웃처럼 종이컵에 담아주는 아메리카노가 기분을 씁쓸하게 한다. 그나마 옛 기억을 끌어내는 힘은 낡고 오래된 집과 물건, 다방이라는 상호에서만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만들어 낸 추억이다.

다방(茶房)의 다자는 차를 뜻하는 한자어다. 차를 중시한 고려시대에는 차를 관리하는 `다방'이라는 관청을 두고 나라행사에 쓸 차를 준비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차를 공급하면서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는 일을 맡아서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급 인재들이 관리하던 지체 높던 다방이 한때의 호시절을 보내고 변태업소라는 불운을 겪더니 세월의 흐름 속에 화려하게 변신했다. 카페를 거쳐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커피전문점으로 거듭나 같은 상호의 똑같은 커피를 마시게 한다.

식사 후 커피 한 잔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버린 사람들에게는 안성맞춤이겠지만 나는 아직도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이 운영하던 `제비'같은 다방이 그립다. 문학과 예술인들의 아지트 같은 낭만이 있는 곳. 그래서 어디서든 다방 간판이 보이면 무작정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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