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판이 만만해지는 이유
정치판이 만만해지는 이유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8.04.01 19: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불명예스러운 의혹을 받게 되면 무조건 오리발부터 내미는 것이 이 나라 엘리트들의 버릇이 된 지 오래다. 목격자나 증인은 공작으로, 물증은 조작으로 몰아가며 부인으로 일관한다. 말 그대로 빼도 박도 못할 상황까지 몰려야 시인을 하기 시작하는 데, 그것도 명백하게 드러난 부분까지만 단계적으로 인정해 간다. 가증스러운 것은 지은 죄가 아니라 죄를 짓고도 반성은커녕 요리조리 발뺌하며 세상을 속이는 기만적인 태도이다.

정봉주 전 의원 사례도 정치 엘리트들의 이런 결함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성추행 의혹을 받자마자 음모로 몰아갔다. 피해자가 당했다는 당일에는 문제의 호텔에 가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한 공중파 방송의 시사 프로그램에 그날 행적을 담은 사진들까지 공개하며 피해자를 윽박질렀다. 보도한 언론도 고소했다.

그러나 그날 호텔에서 사용한 카드 내역이 밝혀지며 진실을 덮어버리려던 그의 발버둥은 가련한 결말을 맞았다. 그가 서울시장 출마 포기를 선언하며 남긴 넋두리는 일말의 동정심마저 앗아갔다. “호텔에서 카드를 썼으니, 가긴 간 모양이지만 누군가를 성추행 한 기억은 없다”고 말했다. 그날 호텔에 가지 않은 기억만 생생했다는 그는, 그래서 아직 피해자에 대해서는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있다.

구속된 두 분 전직 대통령도 다를 게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최근 검찰이 밝힌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만으로도 용서받기 어렵다. 대통령은 그날 근무시간에 침실에 홀로 칩거해 안보실의 비상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최초 보고는 세월호가 물속에 거의 잠겨 골든타임을 넘긴 후에야 받았다. 뒤늦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방문도 몰래 청와대로 잠입한 최순실이 결정했다고 한다. 20~30분 간격으로 실시간 보고를 받았다는 애초 해명은 새빨간 거짓말이었고, 그 거짓말을 사실로 짜맞추기 위해 상황일지를 조작하고 증언을 날조했다. 그러고도 자신은 음해세력에 엮였을 뿐이라며 조사도 재판도 거부하며 구치소에서 책만 읽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을 고스란히 답습했다. 의혹들을 뒷받침하는 물증과 증언이 차고 넘치지만 모두 정치공작으로 일축할 뿐이다. 가신과 참모, 친척의 증언은 모두 `자신들이 지은 죄를 모면하기 위해 둘러대는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오리발이 통하지 않을 확실한 증거 앞에서는 자신 몰래 아래 선에서 한 일이라며 참모들에게 떠넘겼다. 그는 박 전 대통령에게 배운 대로 검찰 조사를 거부하고 있으며 법정도 기피할 공산이 높다.

지난 2014년 지방선거에서 출마자 8994명 가운데 39.8%인 3579명이 전과자로 밝혀졌다. 10명에 4명꼴이었다. 출마자 전원이 전과자인 선거구도 적지않았다. 올해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도 지역 언론마다 전과자들이 대거 예비후보자로 등록한 민망한 현상을 앞다퉈 보도하고 있다. 예비후보자 절반이 전과자인 지역도 심심찮게 거명되고 있다. 음주운전은 기본이고 사기와 도박에 폭력·성폭행 등 강력범죄를 저지른 예비후보자도 수두룩하다. 어느 분야보다도 준법의식과 도덕성이 요구되는 정치계를 전과자들이 예사로 넘보는 이유는 자명하다. 그들이 보기에도 만만하기 짝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전과자들은 자신보다 더 오염된 정치판에서 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다. 자신들의 흠결이 정치판에서는 사소한 티끌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면서 가당찮은 도전에 나설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유권자들의 잣대 역시 도덕성이 바닥에 떨어졌지만 수치심조차 갖지 못하는 정치판의 후안무치를 겪으며 무뎌질 대로 무뎌졌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사회적 지탄에도 불구하고 전과자 절반 가까이가 당선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전과가 당선의 결정적 하자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현장에서 입증되며 죄를 짓고도 당당한 낯두꺼운 인물들의 정치판 출몰이 도를 넘는 우울한 현실. 국민을 기만하고도 일말의 죄의식조차 보이지 않는 엘리트들의 파렴치가 남긴 또 다른 폐해이다.

처방은 하나다. 그들이 흐려놓은 물에 유권자들이 현혹되지 않는 것이다. 유권자들이 눈을 부릅뜨고 후보들의 면면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것만이 삼류로 전락한 정치를 극복할 해답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