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옹(老甕)
노옹(老甕)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8.03.29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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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최명임

배고픔을 빌미로 태어난 자존심일 거다. 가난을 빌미로 익어간 손맛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장인의 자긍심일 거다.

그도 송 노인처럼 가마에 불질하며 희망을 보았을 거다. 송 노인의 비극적 삶은 닮지 않았어도 소태같이 쓰디쓴 사연이야 없었을 리 만무하지, 그러저러한 사연으로 평생을 꾸역꾸역 독을 짓고 살았을 거다. 독에 대해서는 고수가 되어도 가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그가 독을 지고 장터로 간 날 새댁이었던 어머니는 그 고수의 자존심을 받아 들고 신주 모시듯 모셔왔다. 독의 진중한 가치를 몰랐다 하여도 할머니의 본을 받아 의당 지켜야 할 아녀자의 도리라 여겼다.

독에 무엇을 담았든 어머니 손길은 한결같았지만, 식구들이 먹을 장을 담가놓으면 마음이 숙연해져 어루만지셨다. 안사람의 치성과 독의 열정으로 익은 장은 남루한 시대 식솔들의 얼굴에 핏기를 돌게 하고 노곤한 삶에서 일으켜 세우는 발판이 되었다. 그 사실을 늘 염두에 두었으니 장독에서 철륭신을 보셨을 것이다. 은연중 안사람의 도리를 배웠다. 처음 장을 담그던 날 나도 뒤꼍각시 불러 비손하였는데 진정한 안사람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빈집에 버려진 늙은 독이 남편의 손에 이끌려 내게로 왔다. 안주인이 눈에 밟혀서 가져간다 해도 새집에 어울릴 리 만무한 퇴물이다. 문득 어느 산골 빈집 지기 늙은 안사람이 떠올랐다. 자식들 모두 대처로 떠난 뒤 홀로 집을 지키는 노인을 보며 버려진 듯, 아닌 듯 가슴이 따가웠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성주신도 떠난 빈집 처마 밑에서 먼산바라기 하던 노옹을 가타부타 말없이 장독간에 모셨다. 작은 단지의 가벼움과 중옹의 객기를 넉넉하게 품어주는 너그러움이 참 보기 좋다. 투박하니 꾸밈도 없고 꺼슬꺼슬 벗겨진 나이테가 볼품없이 남루하지만, 세월의 더께가 앉은 탓인지 그윽하게 아우라가 느껴진다.

볼 때마다 정이 가고 날 선 긴장이 더없이 순해진다. 때때로 독을 빚은 장인을 떠올리고 그의 삶까지도 유추해 보곤 한다. 또한, 지금은 없어져 버린 어머니의 장독간으로까지 마음이 갔다.

어릴 적 황순원님의 `독 짓는 늙은이'를 읽을 때도 어머니의 독에서 씨장의 연륜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때는 송 노인의 슬픔만 보였는데 송 노인의 비애는 상실이다. 조수와 바람난 젊은 아내가 도망간 뒤 송 노인은 절망한다. 자식을 지키고자 하는 절박함과 평생 그의 삶이었던 독을 짓고자 악착스레 가마에 불질하지만, 끝내 쓰러지고 아들을 뉘 집 양자로 떠나보낸다. 독 짓는 일도 상실의 슬픔과 함께 막을 내린다. 가마 안에서 무릎을 꿇고 독의 본질이었던, 그의 처음이었던 흙으로 돌아가는 귀결의 장면은 슬프고도 아름답다.

삶은 비극이든 희극이든 상실의 과정이다. 마당 한편 대옹의 가슴에서 왜 꺼억꺼억 송 노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올까. 내려놓지 못한 덩어리 하나 시간을 거스르고 내 안에서 꾸역꾸역 울어내는 소리이다.

노옹이 점점 좋아진다. 모진 세월을 짊어지고 지금껏 내게로 오는 길이었다니 애틋하고 눈물겹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잔뜩 품고 언제라도 들려줄 것 같고, 달이 짙은 밤이면 웅얼웅얼 이야기 소리 마당을 돌아다닐 것 같다.

문맹의 투박함이 어찌 좋으랴, 다만 독에서 사람을 보는 것이다. 그 사람이 사람의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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