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792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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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재술<전 한국교원대 총장>
  • 승인 2018.03.29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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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 권재술

기억력이 없기로 유명한 나도 기억하는 숫자가 있다. 그것은 바로 299792458이다. 한 번 소리 내어 읽어 보아라. 박자조차 잘 맞는 299792458, 그것은 빛의 속력이다.

`과학은 측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과학 이론은 자연을 관찰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관찰을 정량적으로 하는 것이 측정이다. 측정하기 위해서는 자를 사용해야 한다. 공간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막대자나 줄자를 사용하고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시계를 사용한다. 이와 같이 측정은 모든 과학의 출발점이다. 측정하기 위한 자를 만들려면 기준이 되는 표준이 있어야 한다. 표준은 자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다. 지금의 1미터가 1미터인 것도 사람이 정한 것이다.

이 표준 정하는 일을 국제적으로는 프랑스에 있는 국제도량형국에서 관장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한국표준연구소에서 관장한다. 국제 미터원기는 1889년에 만들어져서 프랑스의 국제도량형국에 보관되어 있다. 이 미터원기는 백금-이리듐 합금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그 복제품이 각국에 배부되었고, 우리나라 표준연구소에도 있다. 질량 단위인 킬로그램원기도 같이 보관되어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자는 이 원기를 기준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 표준 방식은 불안한 방식이다. 왜냐하면 보관하고 있는 원기가 분실되거나 파손되거나 손상이 되면 큰일이다. 물론 고도의 안전장치를 해 놓겠지만 인간이 하는 것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비록 큰 사고가 나지 않는다고 해도 장구한 세월을 이 표준 원기가 버틸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렇다면 영구불변한 표준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옛날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론이 나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상대론에서는 진공 속에서 빛의 속력은 어떤 관찰자가 보더라도 같다고 한다. 빛의 속력이 그렇다면 영구불변인 빛의 속력을 표준으로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1960년 국제도량형 협회에서는 빛의 속력을 도량형 포준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빛이 표준이기 때문에 빛의 속력을 얼마로 정하든지 그것이 표준이 된다. 빛의 속력을 1로 할 수도 있고 100으로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정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새로 정한 빛의 속력이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하던 표준과 많이 달라진다면 대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1미터, 1초와 아주 비슷하도록 빛의 속력을 정한 것이다. 많은 논의 끝에 결정한 것이 299792458이다. 그래서 빛의 속력은 초속 299792458미터가 되었다. 빛이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정해 버렸다.

299792458, 이 숫자는 아마도 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가 될 것이다. 이 우주에 이보다 더 확고하고 불변인 숫자는 없다. 왜냐하면 이 값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빛은 이 우주에서 참으로 특별한 존재다. 태초에 가장 먼저 창조된 것이 빛이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의 바로 그 빛이 만물의 표준이 된 것이다.

299792458, 여러분은 이 값을 비밀번호로 사용해도 좋다. 절대로 변하지 않고,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비밀번호로 했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숫자는 전 세계가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편리하고 안전하지만 비밀로 할 수 없는 비밀번호다.

빛이 생각하면 참 억울할 것이다. 자기의 속력을 인간들이 마음대로 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만사가 다 그런 것이 아닌가? 자기 이름을 자기가 지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내가 내 이름을 지었다면 `재술'이라고 지었겠는가? 태어나자마자 자기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름이 붙여지고, 한 번 지어진 이름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다. 내 이름이 그랬듯이 빛의 속력도 빛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299792458이 되었다. 빛은 죽을 일도 없으니 영원히 299792458로 살 것이다. 폭력도 이런 폭력이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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