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관이여! 조국은 그대의 분노를 믿노라
경찰관이여! 조국은 그대의 분노를 믿노라
  • 정현수<칼럼니스트>
  • 승인 2018.03.29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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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 정현수<칼럼니스트>

고등학교 학교폭력 위원이었을 때의 일이다. 전교 1등인 학생이 지능 낮은 특수반 학생들을 괴롭혀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피해 학생 둘을 마주 세워 놓고 서로 한 대씩 때리게 해 싸움을 붙이고는 콜로세움의 독재자처럼 낄낄거리며 즐겼다고 한다. 피해자와 목격자들의 진술은 일치했지만 회의가 진행되는 4시간 동안 가해 학생은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다짐하면 선처할 수도 있으련만 끝까지 요지부동이었다. 아홉 명의 위원은 가해 학생에게 만장일치로 퇴학처분을 내렸다.

이해할 수 없는 건 피해 학생과 부모들의 태도였다. 지적 장애인 내 자녀가 놀림을 당했다면 부모로서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은데 그들은 의외로 담담했다. 자식이 암소처럼 여린 눈을 울먹이며 간신히 피해 진술을 이어가고 겁에 잔뜩 질려 있는데도 그들은 회의 내내 침착하고 고요했다. 멸시와 조롱쯤이야 일상이 된 듯 지나치게 얌전한 분노에 보는 이가 답답할 정도였다. 안도현의 시(詩)에 등장하는 게처럼, 살과 껍질에 간장이 스며들 듯 그들에게도 폭력과 멸시와 조롱과 핍박이 스며들어 분노의 불이 이미 꺼져버린 것일까.

국민은 개돼지라는 발언으로 파면당한 나향욱 전 교육정책기획관. 이 발언이 신분제를 더욱 공고화해야 한다는 나 씨의 주장에서 나왔기에 단순한 말실수는 아니었다. 개돼지가 된 국민은 분노했고 교육부는 그에게 파면 결정을 내렸다. 나 씨는 징계가 과하다며 소송을 냈고 법원은 나 씨의 손을 들어줬다. 공직자로서 부적절한 발언이었지만 파면에 이를 정도는 아니라는 법원의 판단은 사그라진 국민의 분노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일부에서 나 씨의 복직 저지를 위해 국민청원을 제기했지만 판결을 뒤바꿀 수는 없다.

경찰은 미친개라던 자유한국당 수석 대변인 장제원 의원. 국회에서의 호기롭고 전투적인 논평과는 달리 자신의 SNS에 옹색한 사과문을 몇 줄 적었다. 처음부터 경찰을 사랑했으며 미친개는 일부 경찰에 대한 지칭이란다. 장 의원의 느닷없는 사랑 타령에 경찰은 당혹스럽다. 사실이라면 이건 데이트 폭력이다. 국민은 개돼지고 경찰도 국민이니까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거라 생각했겠지. 선거를 앞두고 성난 경찰을 달래는 게 급선무니까. “대충 몇 줄 써 삐리라.”하는 당 지도부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역설적이게도 무력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가장 확실한 장치다. 전쟁을 막으려면 전쟁을 결심해야 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비민주 적폐 세력을 힘으로 제압해야 한다. 약자를 동반자로 인식하지 않는 야만의 시대에 무기력과 무저항은 결코 미덕이 아니다. 힘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즉각 저항하지 않으면 반복되다가 결국엔 정당화된다. 지적 장애는 조롱의 대상이고 냄비 근성의 국민은 개돼지가 분명하며 정치권력에 복종만 해왔던 경찰은 몽둥이를 부르는 미친개라는 인식은 모두 적극 저항하지 않은 결과다.

저항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으면 더 큰 폭력을 더 자주 마주하게 된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끝까지 사과하지 않던 가해 학생과 우리 딸은 절대 그럴 애가 아니라고 무조건 감싸던 엄마도 암소 눈의 피해자를 보고 뻔뻔한 자신감을 얻었으리라. 경찰을 사랑한다는 장 의원의 사과 또한 경찰의 대응이 별로 위협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사과해 놓고 끓는 냄비가 식기를 바랄 것이다.

미친개 발언을 더 자주 들을 것인가, 위협적으로 분노할 것인가. 경찰관이여! 조국은 그대의 분노를 믿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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