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 거는 기대
그들에게 거는 기대
  • 이두희<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 승인 2018.03.2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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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이두희

봄은 남쪽에서 시작되는 꽃소식을 타고 온다. 산골짝 눈이 채 녹기 전부터 동백꽃, 매화꽃, 산수유 등의 꽃소식이 남해의 수많은 섬 사이를 거쳐 북쪽으로 뻗은 강줄기를 따라 한반도 전체로 퍼져 나간다. 꽃소식은 이곳저곳 숨 가쁘게 달음질치는 것 같지만 북으로 전달되는 속도는 우편배달부 자전거보다 느리다. 시속 900미터. 어린애 걸음 정도의 속도라고 한다.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개나리의 피는 시간 차가 약 3주라고 하니 그렇게 계산이 되는가 보다. 봄은 아장아장 걸어온다는 시인들의 표현이 그냥 문학적이기만 한 말은 아니었다.

봄은 여인의 옷자락을 타고 온다고도 한다. 요즘 유행하는 두툼하고 푹신한 다운점퍼가 옷장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원색의 블라우스에 짧은 치마가 거리를 활보할 때쯤이면 완연한 봄이라고 여기게 된다. 봄의 설렘이 여인들의 옷자락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렇지만 여인의 옷자락으로 오는 봄은 도회지에서 시골로 천천히 흘러간다. 봄꽃이 다 떨어질 무렵에야 시골 오일장에 나오시는 할머니들의 옷자락에 도달한다.

또한 봄은 새내기들이 북적이는 학교교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교실마다 새로운 기운이 넘쳐난다. 심지어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평생교육원 교실에도 신선한 바람이 분다. 살아가면서 새 인연을 만나는 것만큼 가슴 뛰는 일도 없으리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서 생기는 기대와 두근거림 위에 봄 소식이 얹히면 힘찬 삶의 에너지가 되어 주변으로 퍼진다. 그렇게 봄은 에너지화되고 관념화되어 힘든 계절을 넘어온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추게 되는 것이다.

청주에 위치하고 있지만 공군사관학교의 교정에는 봄이 조금 서둘러 도착한다. 2월 중순이면 4주간의 혹독한 훈련을 마치고 어깨에 은빛 활주로 하나. 1학년 생도를 맞이하는 입학식이 거행된다. 선배 조종사들의 축하비행과 블랙이글의 화려한 에어쇼를 보며 그들은 짜릿한 성취감을 맛본다. 그들에게 지난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춥고도 화끈했으리라. 갑작스레 몰아닥치는 영하 15도 한파와 맨몸으로 맞서야 하고, 걸핏하면 수북이 내려 쌓이는 눈 위를 뛰고 뒹굴어야 했다. 그들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추위와 배고픔과 졸림을 이겨내면서 사관생도의 기품과 절도를 배웠다. 입학식에 참석한 부모님들은 그들의 바뀐 모습에 기어이 눈시울을 붉히고 만다. 부모님들에게 뿌듯한 희망과 보람, 그리고 봄의 활력을 전한다.

독일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한병철 교수는 현대사회를 `피로사회'라고 규정하였다. 대립적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 과잉으로 인해 스스로를 몰아붙이게 하는 성과주의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과주의의 결과는 면역학적 질병이 아니라 우울증과 성격장애, 소진증후군과 같은 신경증적인 병리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진단하였다. 무한경쟁을 통해 겨우 한 계단 위의 사회로 진입한 신입생들에게 또 다른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나 다름없다. 자칫 그들마저 피로에 빠트리고 좌절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청청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무언가 성과를 내야 하는 것이 현대사회의 병증이라면 그것을 멈추고 변화시킬 수 있는 힘도 그들이 갖고 있다. 역사적 사례가 드물 정도로 고속 발전을 이룩한 대한민국은 현재 피로사회의 선두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봄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잔인하지만 그들의 어깨에 희망과 기대라는 무거운 짐을 올려놓으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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