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평안하게 만드는 안심사를 찾아서
마음을 평안하게 만드는 안심사를 찾아서
  • 김명철<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8.03.2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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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 김명철

청주에서 대전 가는 길 남이 외천 삼거리에서 서북쪽 사동리로 10여 분 정도 고즈넉한 산길을 자동차로 달리면 남이면 구룡산 기슭에 위치한 안심사가 나온다. 절 입구에 있는 `참 좋은 인연입니다.'라는 안내 표찰이 답사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임진왜란 때 영규대사와 조헌장군이 이곳 안심사에서 승병과 의병 1500여 명을 모아서 9월 6일(음력 8월1일) 청주성 서문으로 총공격을 가해 조총으로 공격하던 일본군을 물리치고 청주성을 탈환했던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다.

안심사는 청주지역의 오래된 사찰 가운데 문화재인 국보와 보물이 존재하는 곳이므로 한 번쯤은 답사를 해야 할 유서 깊은 곳이다. 조계종 25교구 가운데 제5교구의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로 `안심사고적연대표'에 따르면 775년 신라 혜공왕 때 진표율사가 제자들에게 평안한 마음으로 수행에 전념토록 하였다고 하여 안심사로 불렸다고 한다. 1325년 고려 충숙왕 때 원명국사가 중창하였다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안심사는 진입로의 계단을 오르면 왼쪽에 선방이 있고 오른쪽의 높은 단 위에 영산전이 서향하고 있다. 대웅전은 안쪽 깊숙한 곳에 남서향하고 있으며 대웅전의 오른쪽에는 국보 297호인 영산회괘불탱이 우뚝 걸려 있고, 왼쪽에는 산신각과 세존 사리탑과 탑비가 있다.

보물 제664호로 지정된 `청주 안심사 대웅전'은 본래 정면 3칸, 측변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었으나 여러 차례 중수하면서 측면이 2칸으로 줄어들었고, 지붕도 맞배지붕으로 바뀌게 되었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에, 좌우에는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를 각각 모시고 있다. 대웅전의 정확한 건립 연도는 알 수 없고, 전체적으로 조선 중기 이후의 다포계 건축물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나 조선 초기의 수법도 간직하고 있어 다포계 건축물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로 평가된다. 아울러 조선 후기 사찰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불전의 규모가 축소되고 구조가 변경되는 과정도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안심사에서 반드시 봐야 할 문화재가 바로 국보 297호인 `안심사영산회괘불탱'이다. 대웅전 옆에 걸려 있는 거대한 이 탱화는 1652년 효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설법을 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이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보살, 제자, 제석천, 범천, 사천왕, 팔부중 등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크기는 가로 472cm, 세로 726cm이며 17세기 중엽의 충청지역의 불교회화 연구에 도움을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별로 깊지 않은 산속에 고즈넉하니ㅁ 자리 잡은 안심사에는 현재 보물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유형문화재 27호인 `청주안심사 세존 사리탑'과 제112호인 `안심사 비로전', 제344호인 `청주안심사 법고'등이 있다. 이들은 안심사 창건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청주 지역의 문화 중심지로서 자리 매김한 역사와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이번 봄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에 빼앗겼던 조선의 성 가운데, 우리 민중의 힘으로 가장 먼저 되찾은 청주성의 저력이 숨어 있는 안심사를 가봐야겠다. 절 마당의 약수를 마시며 고향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걸었던 선조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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