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종 전 비서실장과 재판하는 판·검사들께
이원종 전 비서실장과 재판하는 판·검사들께
  • 김기원<시인·편집위원>
  • 승인 2018.03.28 17: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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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 김기원

긴 고심 끝에 이 글을 씁니다. 공직자의 일탈행위 그것도 대통령 비서실장이라는 최고위직 공직자의 일탈행위를 비호하는 듯한 글을 쓴다는 게 온당한 것인가 와, 위법 여부를 심판할 재판관들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칼럼을 지상에 싣는 게 시대정신에 부합하는가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이원종 전 실장은 최순실 국정농단이 터지자 곧바로 자진사퇴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네 번째 비서실장이었습니다. 따 놓은 당상이라는 충북도지사 3선도 마다했듯 무욕과 비움의 삶을 살고자 애썼던 분이지요.

박 전 대통령은 물론 친박 실세 정치인들과도 특별한 인연이 없었던 그를 비서실장으로 앉힌 건 집권여당의 총선 참패와 이반된 민심을 다잡기 위해서였습니다. 행정의 달인이라는 그의 경륜과 깨끗한 이미지가 필요했던 거죠.

그러나 재임 5개월 동안 문고리권력 3인방이 처 놓은 인의 장막에 막혀 국정장악과 인적 쇄신은커녕 국정농단의 주범인 최순실의 존재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얼굴마담 노릇만 하다가 물러난 비운의 비서실장이었습니다. 더욱이 재임 중에 국정원 특수활동비 1억5000만 원(월 5000만원씩 3회)을 상납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재판까지 받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처음 검찰에 소환되는 날 소식을 전해 들은 전직 충북도청 우모 과장은 신새벽에 서울로 올라가 그의 집에서부터 검찰청사까지 동행하며 `지사님 사랑합니다 힘내세요'라고 응원해 주위를 놀라게 했고, 그를 아는 수많은 이들 또한 `그럴 분이 아닌데 어쩌다 저리됐을꼬'하며 혀를 찼습니다. 부당한 돈을 요구하거나 부정을 저지를 위인이 아니라는 걸. 설사 관행으로 알고 받았다 할지라도 자신의 치부를 위해 착복하거나 부당한 대가를 제공할 분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하여 충북도민들이 그의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작성해 지난주에 담당 재판부에 제출했습니다. 저는 물론 도내 자치단체장을 비롯한 지역원로 5433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서명한 진정어린 탄원서를. 물론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해야 하고, 불법을 저질렀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단죄함이 옳습니다.

하지만 이 실장은 정상참작을 할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국정원 특활비가 국가 예산인 만큼 사적 용도로 쓰지 않고 공적용무로 썼다면 예산전용이지 횡령이 아닐뿐더러 금품을 요구하지 않았고 상응하는 대가를 제공한 사실이 없었다면 범행공모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수수 사실을 변명하거나 발뺌하지 않았고, 용처까지 세세히 적은 자술서를 제출하는 등 수사에 적극 협조했으며, 잘못된 관행을 막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통회하고 있기 때문에 선처함이 마땅합니다.

그래요. 그는 제가 벗할 수 없는 지위와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음에도 격의 없이 소통했고, 공사가 분명했으며, 늘 가을 하늘같이 맑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청명한 가을 하늘 냄새가 나는 향기로운 분이었습니다. 까마귀 골에 백로가 간 게 잘못이지만 사실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던 많은 국민처럼 그 또한 박 전 대통령의 진면목을 몰랐을 터이니 어찌 책망할 수 있으리. 아무튼 검찰에 불려가는 이 실장의 초췌한 모습을 언론을 통해 보는 건 시대의 아픔입니다. 부디 시련을 잘 극복하시고, 국가의 원로로 거듭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재판에 참여하는 판·검사님들께 한 말씀 올립니다. 구차하게 이 실장의 지난 삶의 궤적을 나열해 선처해 달라 하지 않겠습니다. 법관의 양심으로 재단하시되 그의 눈과 얼굴에 탐욕과 위선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면 엄벌하시고 그렇지 않다면 지역의 큰 바위 얼굴로 남게 해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는 국정농단 쓰나미의 피해자이며, 못난 대통령을 둔 우리 모두의 잘못입니다. 그를 재판하는 당신들도.

/시인·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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