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과 음표
콩나물과 음표
  • 임현택<수필가>
  • 승인 2018.03.27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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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임현택

얼마전 진종일 비가 내렸다. 앙상한 나무초리에 물이 오르고 고깔모자처럼 뾰족하게 움트는 새순들, 둥근 이파리를 돌돌 말아 물속에서 촉을 띄우는 수련도 쏘옥 고개를 내미는 봄이다. 시골집 작은 화단에 묵은 낙엽들을 손을 갈퀴 모양으로 만들어 대충 치웠다. 그런데 낙엽들 속에 가느다란 줄기가 토사를 뚫고 쭉 밀고 올라온 새싹들은 마치 콩나물처럼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다.

생전 어머니도 겨울이면 늘 안방 윗목에 콩나물을 키우셨다. 떡시루에 삼베를 깔아 콩나물시루를 만들고 Y자로 된 나뭇가지에 고무줄을 매달은 새총처럼 생긴 나무받침대를 수반(고임통)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콩나물시루를 올려놓고는 얇은 이불을 덮어놓았다.

어머니는 수시로 받침대에 있는 바가지로 물을 퍼 주셨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줄 때면 우물을 퍼 올려 물동이에 담는 것처럼 허리를 굽혀 한 바가지 푹 퍼 올려 죽을 쑤듯 휘휘 콩나물시루에 골고루 물을 주신다. 두 번을 퍼 올리기도 전에 금방 콩나물시루는 청아한 계곡물 소리를 내며 아래로 쪼르르 흘러내린다. 난 그 소리가 참으로 좋았다. 겨우내 꽁꽁 얼어 있던 얼음이 녹아 계곡물이 흘러가는 그 소리, 쪼르르 합주를 내며 수반으로 떨어지는 물소리는 봄이 오는 소리다.

수반의 물을 어머니는 콩나물을 다 뽑아 먹을 때까지 갈아 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한결같이 잔뿌리도 없이 길쭉한 콩나물은 키 재기라도 하는 양 어느 날부터 덮고 있던 이불을 볼록하게 들고 일어난다. 소싯적 영양제도 주지 않고 오로지 물만 먹고도 길쭉하게 쭈욱 자라는 콩나물이 궁금하고 조바심이나, 햇빛을 보면 콩나물 대가리가 파랗게 변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어머니 몰래 들춰보곤 했다. 어머닌 파랗게 변해 질긴 콩나물로 요리하시면서도 모른 체 입가에 언제나 엷은 미소를 머금고 계셨다.

겨우내 콩나물 한가지로도 성찬이다. 한 움큼 쑥 뽑아 올려 만든 콩나물밥과 콩나물국은 성찬보다도 더 푸짐한 밥상이다. 넓은 대접에 김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밥을 한 주걱 퍼 담고, 쫑쫑 썬 파, 깨소금 그리고 참기름을 넣어 만든 양념장으로 쓱쓱 비비면 물비늘처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이 최고의 맛이다.

콩나물비빔밥을 먹는 날엔 온 방에 미각을 자극하는 참기름냄새가 식욕을 돋우고, 아버지 콧등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밥상머리에서 반찬투정도 잊게 하는 별미다.

그렇게 흔한 콩나물은 음악 시간에도 따라왔다. 어디서 유래가 되었는지 음표를 콩나물 대가리로 표현했다. 꼬리 없는 하얀 콩나물 대가리를 2분 음표, 꼬리 없는 까만 콩나물 대가리는 4분 음표다. 꼬리 하나 달린 콩나물 대가리, 꼬리 둘 달린 콩나물 대가리도 오선지위에 길고 짧게 그리고 높고 낮게 너울너울 음악 시간이면 오선지위에서 춤을 추면서 콩나물 대가리 음표는 친숙하게 따라다녔다.

화단에 봄볕이 걸렸다. 점점 계곡의 물소리가 커지는 이 봄, 밋밋한 눈가에 잔주름이 그림을 그려놓듯 진하게 자리 잡은 나이에 들어서면서 추억의 소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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