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내리는 날의 단상
봄비 내리는 날의 단상
  • 백인혁<원불교 충북교구장>
  • 승인 2018.03.26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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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숲
▲ 백인혁

봄비가 내립니다. 겨우내 죽은 듯 서 있던 버드나무 나목이 움을 틔우는지 푸릇한 기운을 띠었습니다. 봄비가 내렸으니 온몸으로 비를 맞은 움들이 기지개를 켜며 잠에서 깨어나기에 바빠진 것 같습니다. ‘어서어서 물기를 빨아올려 새잎을 피우자. 따스한 봄바람에 춤출 수 있게.’하면서 신바람이 나서 콧노래를 부르는 것 같습니다.

꿈결에 들려오는 나무들의 노랫소리 ‘봄비야 내려라. 아주 많이 내려라. 겨우내 목이 말라 지쳐버린 우리들 새로운 힘을 얻도록. 봄비야 내려라. 부드럽게 내려라. 지난겨울 강추위와 싸우다 지쳐 잠이 든 우리들, 곤히 잘 수 있도록. 봄비야 내려라. 오래오래 내려라. 저 깊은 땅속에서 겨울잠 자는 친구 개구리가 깨도록’ 혼곤히 잠에 취해 나무들의 합창을 듣다가 자명종 소리에 잠을 깹니다.

그래요! 계속 내릴 것 같던 비는 어느새 그치고 맑은 하늘이 아침을 열어 줍니다. 상쾌한 마음에 창문을 열고 멀리 보이는 산을 봅니다. 아마 하루 이틀 지나면 산색이 변하겠지요. 보일 듯 말 듯 연한 녹색으로부터 시작해 짙푸른 녹색이 될 때까지 언제나 미완성으로 사라지는 그림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다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칼바람 북서풍에 맨몸으로 맞서고 꽁꽁 얼어붙은 겨울밤을 별을 보며 지새웠어도 봄비를 만나자 그렇게 감사하며 신이 나서 새 삶을 시작합니다. 어렵고 고된 인생사에 지친 우리도 누군가를 만나서 그간의 모든 고통 다 잊어버리고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새 힘을 얻고 새 삶을 시작할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봄비가 아무리 좋아도 죽어버린 식물은 봄비의 기운을 받지 못할 것이며 새잎을 틔울 수도 없을 것입니다. 어떠한 고통도 다 이겨내고 살아 있는 나무라야 봄비를 만나 새 기운을 받고 새로운 삶을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며 살아갑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도 내가 받을 준비가 안 되었거나 원하는 바를 상대방이 가지고 있지 않아도 주고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런 교류가 없이 그저 스쳐만 갔어도 상대방과 나는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게 됩니다. 의미 없이 살아가는 허무한 인생 같지만 내가 나의 자리를 지켜만 주고 있어도 상대방은 새로운 기운과 희망으로 힘차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내가 누군가와 만났을 때 봄비 같은 새 힘과 희망을 주려면 주는 것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야 할 것이며, 짜지도 맵지도 않아야 할 것입니다. 담담한 물맛 같아서 상대방이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상대방으로부터 받을 때도 내가 필요한 만큼만 받아야 서로의 만남이 즐겁고 신이 납니다. 하지만 없는 것을 내놓아라, 왜 많이 가지고 와서 나를 힘들게 하느냐는 등 자신 입장을 내세우며 상대를 만난다면 만날 때마다 다툼만 남게 될 것입니다.

비록 잘나지 못해 햇볕을 좇아 양지쪽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나를 향해 오는 햇빛이 방향을 돌리지 아니하듯, 봄비가 대지를 골고루 적셔주듯 내 모습 그대로 만나주고 상대방도 가감 없이 그대로 받아주며 어울려 인생을 살아갈 때 언제나 만남이 즐겁고 행복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꾸밈이나 바램 없는 마음으로 모두에게 다가갈 때 나를 만난 상대방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새 힘과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살려내는 힘은 의도적으로 어떻게 해서 된다기보다는 본래 주어진 대로 삶을 충실하게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우리 주위에 충만해 지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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