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가치
실패의 가치
  • 서옥진<청주시 흥덕구 세무과 주무관>
  • 승인 2018.03.25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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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 서옥진

몇 주 전, 대전에 가서 영화를 봤다. 청주에 영화관이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대전까지 이동한 이유는 재개봉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간과 돈을 들여 관람한 영화는 `덩케르크'였다.

`덩케르크'가 개봉했을 때 수험생이었던 나는 감히 영화를 보지 못했다. 취미라고는 기껏해야 영화 감상 정도인데 이 즐거움 하나를 내어줘야 다른 하나를 얻을 것 같은 미신 같은 생각에 시달렸다. 나약한 마음이 만든 불안이었다. 모든 채용 과정이 끝났을 때엔 영화가 이미 극장에서 사라진 뒤였다. 뒤늦은 감상을 하며 느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이 영화를 보았다면 그러한 불안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거다.

영화 속 등장인물은 평범하다. 전쟁 영화라면 등장할 법한 극적인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등장인물은 구조선을 빨리 타기 위해 새치기를 시도하고 살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위해 나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거기까지일 뿐 그를 대신해 희생까지 하진 않는다. 그들을 움직이는 동기도 위대하지 않다.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영화는 전쟁 중 철수에 대해서 그리고 있는데 성공이 아닌 실패를 다루고 있음에도 그 시선이 따뜻하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토미는 물론 출정 후 동료를 모두 잃은 공군조차도 자신이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 고개를 숙이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들이 영국 본토를 다시 밟기 위해 많은 변수와 두려움을 견디어 온 것을 안다.

영화는 끝나지만 그 안의 인물들의 삶은 끝나지 않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덩케르크 작전 이후의 영국본토항공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만들고, 영화 내내 살아남기를 바랐던 그들이 영화의 마지막 이후에도 살아남았다고 확신할 수 없게 한다.

이와 같은 불확실성은 살아 돌아왔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감상을 더 강화시킨다. 후퇴를 부끄러워하는 병사들에게 살아 돌아온 것으로 충분하다며 잘했다고 격려해줬던 눈먼 노인은 영화가 관람객에게 들려주고자 했던 위로를 직접적으로 들려준다.

`우린 살아 돌아왔을 뿐인데요.(All we did is survive)''

`그것으로 충분하네. 잘했어, 젊은이.(That's enough. Well done, lads)'

나 역시 취업준비생 시절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익숙했고 쌓여가는 이력서의 개수, 면접 경험이 부끄러웠다. 실패를 부끄러워해야 하는 세계는 가혹하다. 스스로의 노력을 부끄러워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가치 있는 삶이 아니라고 치부하는 것은 노력의 비교 대상을 외부에서 찾는 데에서 온다. 다른 누군가보다 더 나은 직장을 얻었는가, 더 나은 성적을 얻었는가. 하지만 노력의 비교 대상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비록 원하는 것을 얻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고귀하다. 실패의 횟수는 노력의 횟수이기 때문이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조금 더 나아갔다면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실패는 무가치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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