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시
에이전시
  • 정세근<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8.03.2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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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외래어로 국어사전에도 나오는 말이다.

에이전시(agency) 【명사】 ① 대리업. 대리점. ② 방송 등의 광고 대행업자.

쉬운 듯하지만 이 말 참 어렵다. 우리에게는 없는 서구적 문화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맡긴다는 것인가? 왜 맡기고, 어디까지 맡기나?

비슷한 개념이 신탁(信託)이다. 신탁통치(trusteeship)라니? 신탁이란 말 그대로 믿고 맡긴다는 것인데, 누가 누구를 믿고 맡기나? 한국의 신탁통치는 우리가 바라지 않게 결국 남북분단의 씨앗이 되었고, 게다가 미국과 소련이 누구의 부탁으로 남과 북을 맡았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사람이 맡겼어야 신탁이고 따라서 우리가 믿는 사람이 신탁통치를 하는 것인데, 맡긴 사람(trust)은 없는 데 맡은 사람(trustee)은 있다니 요상하다.

이런 문화는 계약(contract)이 사회의 중요한 개념이 된 서구사회의 산물로 보인다. 만사를 계약으로 취급하는 문화적 경향성에서 비롯된다. 우리말에서는 `너에게 일임하니 알아서 해봐라'라고 할 때의 일임(一任), 위임(委任), 위탁(委託) 개념이 위의 용어와 통한다.

에이전시로 돌아가자. 난 이 말의 뜻을 `신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한데, 이 세상에는 왜 악이 있느냐?'라는 질문과 관련하여 비로소 알았다. 세상은 신이 만들었고 모든 것이 그렇게 자리 매김 되어 있는데, 나쁜 일은 어째서 벌어지는 걸까? 신의 장난인가, 실수인가? 실수라면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고, 장난이면 신은 완선(完善)하지 않다.

그것을 설명하는 이론이 곧 `대리인 이론'(agency theory)이었다. 신에 의해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지만, 신이 사람을 믿고 알아서 해보라고 하니 사고가 터진다는 이론이다. 여기서 사람이 곧 에이전시다. 이른바 결정론(決定論: determinism)에서 악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인간에게 대리인으로서의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주었더니 탈이 났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의지는 생각처럼 좋은 뜻이 아니다. 악의 근원이 바로 자유의지이기 때문이다.

회사조직에서 평사원의 위이자 과장의 아래를 대리(代理)라고 부르는 까닭도 대리 정도면 알아서 일을 할 정도가 되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다. 평사원이야 항상 관리돼야 하고, 과장이면 주체적으로 의사결정을 해도 되지만, 대리는 그 중간쯤에서 일한다.

2016년 히로시마를 방문한 오바마는 방명록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전쟁의 후과를 알고 있다. 평화가 널리 퍼지도록, 핵무기 없는 세상을 좇도록 지금 우리 함께 용기를 내보자.'(We have kno wn the agency of war. Let us now find the courage, together, to spread peace, and pursue a world witho ut nuclear weapons.)

위의 문장 가운데 `에이전시'라는 말이 나온다. 그냥 전쟁의 `작용, 기능'으로 번역하면 맹맹하다. 단순한 전쟁의 결과나 결말(result)이 아니라, 전쟁의 매개 또는 알선으로 벌어지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확대해석하면 일본이 전쟁을 하여 핵폭탄을 만들 수밖에 없었고, 미국은 자발적이고 고의적으로 핵을 터뜨린 것이 아니라 전쟁이 핵을 가져다주었다는 말이 된다. 신의 에이전시가 사람이고 그 때문에 악이 나왔듯이, 전쟁의 에이전시가 핵이고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내가 신에게 일본인에게 동북아의 평화를 맡기는 것은 마치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과 같다고 말하면 신께서 화내시려나?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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