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외출
화려한 외출
  • 신금철<수필가>
  • 승인 2018.03.2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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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신금철

벙근 웃음꽃이 활짝 핀 건 공항 대합실에서였다. 총무를 담당한 친구가 예매한 제주행 비행기 좌석 표를 찾기 위해 신분증을 모아 창구로 가더니 헐레벌떡 달려와 나에게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내가 신분증 대신에 신용카드를 주어 표를 못 받고 돌아온 것이다. 순간 여섯 명의 웃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일흔의 나이가 실감 났다.

`평소에 찬찬했던 네가 웬 실수냐?'고 놀려대는 친구들이 밉지 않았던 것은 실수에도 너그러운 동창생들이었기 때문이다.

여고를 졸업한 지 50년, 일흔 고개에 올라선 기념으로 제주여행을 앞두고 잠을 설쳤는지 내 옆 좌석에 앉은 친구들은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눈을 감았다. 나도 잠을 설쳤지만 잠이 적은 나는 슬그머니 친구들의 조는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으며 미소를 지었다.

제주도의 하늘은 투명한 햇살을 쏟아내고, 노란 유채는 가벼운 몸짓으로 하늘거렸다. 우리는 패딩을 벗어버리고 티셔츠에 걸친 스카프를 휘날리며 유채 밭에서 노니는 나비가 되었다.

서글픈 일흔의 나이와 힘들었던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관절의 통증도 잊었다. 손을 꼭 잡고 올레 길을 걸으며 꿈 많던 여고생으로 돌아가 마냥 즐거웠다. 바닷가 고운 모래 위에 남편의 이름을 쓰고 하트를 날리는 친구의 모습은 소녀였고, 그를 놀려대는 친구들도 소녀가 되어 영화의 주인공처럼 모래밭을 달렸다.

몽골인들이 펼치는 말 공연을 관람하며 만주벌판을 누비던 광개토대왕의 위대함과 좁은 땅마저 갈라져 통일을 갈망하는 나라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공중서커스를 관람하며 손주 같은 아이들의 아찔한 곡예에 애처로워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가 되기도 했다.

우리는 쑥스러움을 잊은 채 멋진 포즈를 취하며 아름다운 제주를 배경으로 수백 장의 사진을 찍었다. 음악교사를 했던 친구의 오르간 반주에 맞춰 `학교종', `여고 시절'의 노래를 부르며 가슴 찡한 시간도 가졌다.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담는 카트가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고심하던 친구가 `리어카'를 찾는 바람에 슈퍼가 떠나가도록 배를 움켜쥐고 박장대소를 했다. 선글라스를 쓴 친구가 내 손에 들려 있는 선글라스를 빼앗아 자기 얼굴에 겹쳐 쓰려고 애쓰는 모습에서도 눈물이 날 정도로 함께 웃기도 했다.

마음과 달리 헛소리가 나올 때는 함께 웃고, 희미한 드라마 제목과 주인공의 이름도 함께 기억하려 애를 썼다. 나이 듦을 인정하고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신문도 읽고 부지런히 운동도 하며 건강에 유의하자고 서로를 위로하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내가 끓인 된장찌개와 김치찌개에 마른반찬 몇 가지의 부실한 식단으로 식사했지만 제주에서 맛본 유명 식당의 음식보다 더 맛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우정이라는 양념과 사랑으로 조리한 음식이었기 때문이리라.

여고를 졸업하고 마음에 맞는 친구들끼리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며 정을 쌓은 지 25년이 흘렀다. 그동안 수없이 말로만 떠났던 여행의 바람이 결실을 맺은 `칠순 맞이 화려한 외출'로 우리의 우정은 더욱 돈독해졌다.

`나이 들면 돈을 세지 말고 친구를 세라.'는 말처럼 3박 4일의 제주 여행은 욕심도, 걱정도 내려놓고 단발머리 여고시절로 돌아갔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친구들 모두 건강하여 함께 아름다운 노후를 보낼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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