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어디에서 오는가
봄은 어디에서 오는가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8.03.2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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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사람이 억지로 꽃을 피울 수는 없다.

며칠 사이 한껏 풀어진 기온에 들떠 서둘러 나선 봄 소풍 길, 조급한 내 마음을 탓하듯 봄비가 꽤 많이 내린다.

내 가슴에 묻었던 내 모습은/ 그대 보고 싶은 눈물로 살아나고/ 그대 모습 보입니다// 내 가슴에 메말랐던/ 더운 피는 그대 생각으로/ 이제 다시 붉게 흐르고// 내 가슴에 길 막혔던 강물은/ 그대에게 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아,/ 내 눈에 메말랐던/ 내 눈물이 흘러/ 내 죽은 살에 씻기며// 그대/ 푸른 모습,/ 언 땅을 뚫고 솟아나는 모습 보입니다 <김용택 봄비1> 일찍 피는 봄꽃 산수유와 매화를 만나러 섬진강 가는 길. 넘치는 비를 맞은 세상의 모든 땅들은 겨우내 묵혀 두었던 시름을 한껏 풀어내는데, 봄비 맞은 내 서러움은 까닭 없이 깊어지고 있다.

아무래도 봄은 우리에게 보다 나에게로 먼저 와야 한다는 욕심 지울 수 없어 노오란 산수유는 아직 여린 빛깔로 빗물에 젖고 있다.

구례 산수유 마을엔 아직 고은 시인의 아득한 조화가 서글픈 꽃 더미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그래도 괜찮단 말인가/ 무슨 천벌로/ 얼지도 못하는 시꺼먼 간장이란 말인가/ 다른 것들 얼다가 풀리다가/ 으스스히/ 빈 가지들/ 아직 그대로/ 그러다가 보일 듯 말 듯/ 노란 산수유꽃/ 여기 봄이 왔다고/ 여기 봄이 왔다고/ 돌아다보니/ 지난해인 듯 지지난해 인 듯/ 강 건너 아지랑이인가 <고은. 산수유꽃>

사람의 마음이 꼭 이렇다. 늙은 여우 조화를 부리듯 세상을 희롱하다가 꽃 나들이 서둘러 가는 길에 서러운 봄비처럼, 아직 제 몸을 마음껏 풀어헤치지 못하는 강물처럼 서툴게 늙어가는 어색함.

잔뜩 비 맞은 화개장터에 흐르는 조영남의 노래.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구비 따라 화개장터에', 무엇이 가짜이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 구분할 수 없는 세상이 처량하다.

광양에는 서툰 매화가 드문드문 꽃잎을 열고 있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무대 최참판댁을 먼발치에서 훔쳐본 뒤 맛본 재첩국은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바다와 강의 어설픈 만남을 닮아 여전히 비릿하다.

섬진강을 따라 이어지는 잿빛 포도(鋪道)위에 비 맞아 떨어진 벚꽃 하얀 잎들을, 아님 맑은 날 꽃 대궐을 이루는 벚꽃의 지나친 풍성함을 상상하는 일은 서둘러 나선 봄 나들이길이 온통 비에 젖은 푸념일 뿐 더도 덜도 아니다.

그저 서둘러 비 개이길 기다리며 희미한 지리산 자락을 휘감아 돌며 흐르는 비구름 몰려왔다가 물러서는 모습에 탄식할 수밖에.

여행길에 사람을 만나는 일은 자연경관이 보여주는 신비와는 또 다른 기쁨이다. 광양에 살고 있는 남도 출신 전직 축구 선수 정현두씨의 친절은 돌담길 모퉁이에 일찍 핀 민들레를 발견한 것 같은 눈부심의 긴 여운을 남기고 있다. 신동엽의 <금강>과 <껍데기는 가라>를 말하는 축구선수에게 대접받은 광양불고기와 시원한 김칫국은 아직도 아련한 뒷맛으로 남아 내 몸과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광양불고기는 일행 중 누구 한 사람의 희생이 있어야 제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참으로 별난 음식이다. 선홍색 얇은 고기를 숯불에 타지 않게 구워야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그의 정성으로 인해 사람 사이에 이어지는 인연의 끈, 그 세상사는 일의 외롭지 않음을 새삼 느끼는, 섬진강 이른 봄 소풍에 어설프게 봄꽃 피었다.

어느 소년 소녀들이나 알고 있다/ 봄이 말하는 것을,/ 살아라, 자라나라, 피어나라, 희망하라, 사랑하라,/ 기뻐하라, 새싹을 움트게 하라./ 몸을 던져 두려워하지 마라!// 노인들은 모두 봄이 소곤거리는 것을 알아

듣는다/ 노인이여, 땅속에 묻혀라/ 씩씩한 아이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라/ 몸을 내던지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헤르만 헤세. 봄의 말> 봄 소풍에서 돌아와 비개인 날.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됐고,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이수복. 봄비 中>올, 우리 사는 땅이 푸른 세상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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