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소로리유적(1)
청주 소로리유적(1)
  • 우종윤<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18.03.1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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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석기생산터에 자리한 오창과학산업단지

역사시선-땅과 사람들
▲ 우종윤

사람은 관심에 따라 생각하는 내용이 다르다. 같은 곳을 보아도 전공에 따라 중요하게 관찰하는 대상이 다르다. 유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경험을 자주하게 된다. 1990년대 충북에서 가장 큰 규모(286만평)로 조성되는 청주과학산업단지(현 오창과학산업단지) 내 유적조사에서도 그러하다. 유적조사의 첫 단계인 지표조사는 학문영역에 따라 6개 분야로 나누어 조사하였다. 모두 199곳의 유적·유물 및 민속자료가 확인되었다. 전공에 따라 주요 관심분야를 정밀 조사한 결과이다. 이 조사에서 필자는 선사고고학분야를 담당하였고 뗀석기를 찾는 것에 관심을 갖고 조사하였다.

1994년 3월 24일. 벼를 수확하고 난 볏단이 계단식 논둑과 논 가운데에 남아 있고 본격적인 농사일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해빙으로 일부 무너진 논둑의 단면에서 햇볕에 반짝반짝 빛나는 흰색의 돌이 박혀 있음이 눈에 들어왔다. 수습하고 보니 석영 자갈돌의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직접 떼기로 격지를 떼어낸 몸돌 석기였다. 논바닥과 둑 주변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10여점의 뗀석기를 더 찾았다. 구석기유적의 존재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는 주요 증거를 확보한 셈이다. 이제는 이들 뗀석기가 출토되는 퇴적층의 존재 유무 확인이 필요하였다. 높낮이 차이를 이루는 논둑의 단면에 토양쐐기(soil wedge)구조를 포함하고 있는 암갈색 찰흙층이 두텁게 잘 남아 있음이 확인되었다. 뗀석기와 퇴적층의 확인, 이는 구석기유적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논둑에서 찾은 것이다. 이렇게 찾은 유적이 청주 소로리 구석기유적이다. 다른 분야에서 주목하지 않는 깨진 석영자갈돌에 관심을 갖은 결과이다.

소로리 유적의 조사는 시굴조사(1996.12~1997.1)와 발굴조사(1997.11~1998.4)로 이루어졌다. 모두 능률이 떨어지는 한겨울철의 조사였다. 허허벌판에서 맞는 세찬 겨울바람과 눈보라는 현장조사를 원활하게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매서웠다. 이러한 나쁜 조사여건에서 부득이 조사진행을 할 수밖에 없어 경기도 양평에서 비닐하우스 자재를 구입하여 대형비닐하우스 수십동을 설치하고 조사하였다. 비닐하우스 속에서의 구석기유적 조사, 이 또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충북대 박물관이 주관하여 4개 조사팀(충북대, 단국대, 서울시립대, 한국지질자원연구원)으로 조사단을 구성하여 발굴조사한 결과 시기를 달리하는 3개 문화층의 존재를 확인하였고, 2,200여점의 석기를 발굴하였다. 석기제작에 사용된 돌감은 주로 규암, 석영 자갈돌로서 당시 사람들이 소로리 주변의 한정된 자원을 적극 활용하여 석기를 만든 반면에 돌감 획득을 위한 영역 확장에는 소극적이어서 자연자원활용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잔손질 된 석기의 종류는 다양하지 않으며 대부분 한 몸체에 한 종류의 석기를 지닌 단순석기로서 긁개와 홈 날이 많고, 주먹대패, 톱니 날, 뚜르개, 찍게 등의 석기로 구성된다. 또한 몸돌, 격지, 망치돌, 모룻돌 등과 함께 서로 되맞은 부합유물이 출토되어 석기제작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유적의 형성시기는 절대연대값, 지층 및 석기의 특징 등으로 볼 때 중기구석기(3문화층), 후기구석기 이른시기(2문화층), 후기구석기 늦은시기(1문화층) 등 3시기로 구분된다. 각각의 시기에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미호천과 가까운 소로리 일대를 점유하여 석기제작 등 생산활동을 하며 일정기간 머물렀음이 석기제작소와 다양하게 완성된 석기들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구석기시대에 주변의 자연자원을 적극 활용하여 석기를 제작, 사용하여 삶을 이어갔던 터에 오늘날 오창과학산업단지가 세워져 그 역할을 이어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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