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사주를 쏟아 귀양 간 충청도 관찰사 이세좌
어사주를 쏟아 귀양 간 충청도 관찰사 이세좌
  • 김홍숙<괴산문화해설사·소설가>
  • 승인 2018.03.1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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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김홍숙<괴산문화해설사·소설가>

이세좌(李世左·1445~1504)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는 맹언, 본관은 광주이다.

아버지는 좌익공신 광성군 이극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세 때 어머니가 `효경'과 `논어'를 말로 전하여 주자 한 번 듣고 잊지 않았다고 한다. 15세에는 경사를 꿰뚫었고 시와 문장에 있어서도 동료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다. 1465년 성균시의 생원에 1등으로 합격하였고 25세에 내섬시 판관으로 관직에 나아가 1504년에 유배지에서 죽을 때까지 34년 동안 관직생활을 하였다.

그의 첫 관직은 판관으로 시작하여 1474년 5월에 도사로서 대행왕비의 빈전에 진향하였으며 이어 건원릉 참봉에 제수되었다. 이후 식년문과에 응시, 갑과로 급제하여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1478년 통정대부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지방으로 나아가 수군을 증가시키기 위한 시책과 변경을 강화할 것을 청하였다. 이듬해 홍문관 부제학 참찬관을 거쳐 이듬해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역임하였다. 그는 교연회에서 여악(女樂)을 사용하는데 여악은 간사한 음악과 음란한 여색이므로 궁궐에 들어와서 밤을 지낼 수 없으니 정지할 것을 홍문관 부제학으로서 차자를 올려 청하였다.

그러나 성종임금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일이라며 윤허하지 않았다.

1481년 흉년이 들자 그는 술을 빚기 위하여 쌀을 소비하는 것으로 보고 떡시루를 가지고 다니는 자도 금할 것을 청하여 왕의 재가를 얻었다. 이때 경기 지방이 실농하여 서적전의 곡초를 사복시에 수납하도록 하고 여러 고을에서 바치는 곡초도 줄여서 백성의 폐해를 제거할 것을 건의하였다.

1483년 가선대부 행승정원 도승지가 되었고 호조참판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86년 경연에 나아가 경제문제와 왜구문제에 관련된 중요한 사항을 청하였다. 예조참판을 거쳐 대사헌·호조참판을 지내고 성종이 죽자 산릉도감 제조가 되어 국장의례를 담당하였다.

1496년 호조판서와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예조판서가 되어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1503년 인정전에서 열린 양로에 참석하여 어사주 잔을 돌릴 때 잘못하여 어의(御衣)에 술을 쏟는 실수를 저질러 온성으로 귀양갔다. 7개월 후 유배에서 돌아왔으나 1504년(연산군10) 홍언국이 후궁 간택에 불응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불똥이 애매하게 그에게 튀었다. 이로 인해 아우와 아들, 자제들이 장 80대를 맞고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세좌는 강원도 평해로 유배되어 고달픈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연산군은 과거 성종 때 어머니 폐비 윤씨가 죽은 일을 거론하며 그때 승지로 갔던 이세좌를 죽일 것을 결심하게 된다. 갑자사화로 거제로 이배되던 중 곤양군 양포역에서 자살의 명을 받고 자결하였다.

연산군은 이세좌의 아들, 사위, 아우로서 귀양간 자는 폐서인(廢庶人)시켜 영구히 사판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홍귀달의 불경죄로 인해 이세좌는 다시 `능상지 풍의 괴수'로 몰려 시련을 겪게 되었고 이러한 풍조를 뿌리 뽑으려고 한 연산군에 의해 그의 삼촌, 동생, 자식 등 모든 일족이 시련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곧 이은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이세좌는 복원되었다. 1506년 (중종1) 예로써 개장(改葬)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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