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동행
행복한 동행
  • 임현택<수필가>
  • 승인 2018.03.13 18: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임현택

봄비다. 잔가지 끝마다 수정 같은 빗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아직 한기가 가시지 않았지만 그간 껴입었던 옷을 한 겹 벗어놓는다. 내복 한 벌이라는 가을비와 달리 대지를 흔들어 깨우는 선각자, 창문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댕글댕글 시를 읊듯 잔잔한 선율을 탄다. 무념무상 정물처럼 앉아 길 잃은 빗속을 더듬고 있을 때 고양이가 다가와 다리에 얼굴을 비비며 정적을 깬다.

애완동물에 각별한 아들은 러시안 블루란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 고양이는 수염(혹은 털)뿌리 부분에 신경세포가 모여 있어 사물의 움직임이나 공기의 흐름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있다. 용케도 아들 발소리를 알아듣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도 전에 현관 앞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기다린다. 손등과 팔뚝엔 온통 고양이 발톱에 할퀴어 상처가 있음에도 자신을 반겨주고, 책상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같이 책을 읽기라도 하는 양 그윽한 눈길로 아들 손끝을 따라가는 행동과 재롱에 아들은 고양이 사랑에 흠뻑 빠졌다. 길고양이는 흙과 모래로 배변을 처리하지만 요즘 애완고양이는 배변모래가 다르다. 먼지발생은 물론 가루 날림이 없는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콩비지 천연소재로 만든 배변모래를 쓴다. 그야말로 호사를 누리고 있는 고양이 가관이다.

얼마 전, 현관문에 장문의 협조문이 붙어 있었다. 고양이 울음소리로 인하여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뿐 아니라, 스트레스받을 정도로 밤에 우는소리는 고문이란다. 일정기간까지 처리를 해주지 않으며 민원을 제기하여 법적 조치를 한단다. 민원이 제기되면서 아들은 분양이란 갈림길에 놓였다. 만남의 인연보다 헤어짐의 고통이 더 견디기 힘든 법, 급기야 아들은 최선책으로 고양이를 중성화수술을 시켜 울음, 가출, 공격적인 행동 등을 교정시켰다. 나로서는 중성화수술 자체가 이해불가지만 현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스런 일, 울음을 잃어버릴까 측은하게 염려하는 내가 외려 이해 못 하는 이방인 꼴이다.

예부터 영물이라 불리는 고양이, 문헌에 의하면 세조 대왕이 어느 날 오대산 상원사 법당을 찾아 예불을 올리는데,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별안간 나타나 세조의 곤룡포 자락을 물고 앞으로 못 가게 자꾸 잡아당기는 것이다. 그런 고양이 행동에 이상한 예감이 든 세조는 밖으로 나와 병사들에게 법당 안팎을 샅샅이 뒤지게 했다. 그런데 불상을 모신 탁자 밑에 세조를 시해하려고 자객들이 칼을 들고 숨어 있었다. 자객들을 끌어내 참하는 동안 고양이는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세조는 죽을 목숨을 구해준 고양이를 위해 가장 기름진 논 5백 섬지기를 상원사에 내렸고, 매년 고양이를 위해 제사를 지내주도록 명했다. 궁으로 돌아온 세조는 서울 근교의 여러 사찰에 묘전을 설치하여 고양이를 키웠고, 전국에 고양이를 잡아 죽이는 일이 없도록 했다. 고양이 논, 또는 고양이 밭이란 뜻으로 이때부터 묘답 또는 묘전이란 명칭이 절에 생겼고, 최근까지도 봉은사 밭을 묘전이라 부른다 하니 영물 중의 영물이다.

여전히 발치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동행하는 고양이, 중성화수술로 울음도 줄고 평온을 찾았다. 소소한 일상에 덧칠된 조건 없는 사랑으로 소확행을 얻는 아들, 빗소리 너머로 엷은 미소가 잔잔하게 번지는 날이다.

* 소확행 - 작지만 확실한 행복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