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사람 우암(5) 사문난적
큰사람 우암(5) 사문난적
  • 강민식<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 승인 2018.03.11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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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 강민식

1623년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차지한 서인은 이후 노론과 소론으로 나뉜다. 노, 소론이 나뉜 것은 현실 정치에 대한 이해 차이로부터 비롯한다. 상대인 남인을 파트너로 받아들이자는 소론에 비해, 앞선 두 차례의 예송(禮訟)에서 물러설 수 없는 예론(禮論)을 이끌던 노론은 남인에 가혹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 노론 측에서는 남인을 크게 내쫓았다 하여 경신 대출척(大黜陟)이라고도 한다. 경신환국으로 집권한 서인은 인조반정 이후 그들이 지향했던 산림(山林) 우대와 국혼물실(國婚勿失)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실현한다. 그런데 예송이나 이후 환국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당한 것은 외척들의 의도가 컸다. 그럼에도 국혼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그들 가문에서 왕비를 배출하려던 서인들은 외척에게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곧 외척이었다.

한편 시골에 숨어 사는 선비인 산림 우대에 따라 또 한 인물인 윤증(尹拯, 1629~1714)이 벼슬에 나선다. 그는 서울에 닿기에 앞서 세 가지 조건을 내세운다. 남인과의 화해, 외척 배제, 그리고 인재의 선발과정 개선이다. 남인을 배척하고 외척에 기반을 둔 서인들로서는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은 윤증은 과천에서 논산으로 되돌아간다. 이 시점을 노, 소론의 분기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분열이 구체화된 것은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윤선거(1610~1669)가 죽자 아들 윤증은 스승인 `그'에게 아버지의 비문을 청했다. 대개의 묘문이 죽은 이의 행적을 미사로 채우는 데 반해, 유독 강화도에서의 사건을 거론했다. 세 차례나 고쳐 줄 것을 바랐으나 끝내 거절하여, 이 비는 결국 세우지 못했다. 하필 `그'는 윤선거의 행적에 그렇게 비판적이었을까. 같은 문하로 오랜 지우(知友)요, 제자 윤증의 아버지이건만 가혹하리 만치 냉정했다.

물론 윤선거의 행동이 대명의리와 복수설치에 벗어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건만 효를 앞세운 명분도 나름 이해할 만했다. 사실 `그'도 삼전도의 굴욕 속에서 명분을 내세울 만한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어머니가 계시는 곳으로 갔을 뿐이다. `그'가 평가한 윤선거, 윤증 부자는 자못 신경질적인 면도 적지 않다. 자못 시간이 흐를수록 깊은 골처럼 간극이 점차 커져가고 있었을 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저편에 한 사람이 있다. `그'는 1637년 남한산성을 나온 후 속리산 복천사에서 10살 아래 윤휴(1617~1680)를 만났다. 이듬해 다시 만나 “사흘 동안 학문을 논했는데, 30년 독서가 참으로 가소로운 것이다.”고 할 만큼 윤휴의 학문을 극구 칭찬했다. 하지만 윤휴는 1642년 `그'와 이기설(理氣說)을 토론하고, 1644년 <중용설中庸說>을 완성했는데, 이 책으로 말미암아 사문난적(斯文賊)으로 몰리게 된다. 명예살인이며, 실제 죽음에 이른 첫째 이유이다. 주자가 <예기>에서 떼내 <대학>과 <중용>을 편차 했는데, 윤휴는 감히 주자의 편목과 주석을 함부로 바꾸고 빠뜨렸기 때문이다. 공자 이후 최고로 꼽는 주자의 글자 하나도 절대시했던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패륜이었다. 그런 윤휴를 윤선거가 옹호하였으니 난신과 적자의 같은 무리로 여겼다. 결국 윤선거, 윤증 부자의 온건함과 개혁론을 윤휴와 연결지어 공격한 것이다.

우리는 이들의 갈등을 그들이 살던 곳에 빗대어 회니시비(懷尼是非)라 부른다. `그'는 한 때 회덕에 살았고, 윤증은 이성(尼城), 지금의 논산에 살았기 때문이다. 이후 노론과 소론은 오늘까지도 화해 없는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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