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머리에서
봄 머리에서
  • 박명애<수필가>
  • 승인 2018.03.0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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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박명애

어느새 경칩도 막 지났다. 오랜 겨울 가뭄 뒤 찾아온 단비가 메마른 대지를 촉촉하게 적셨다. 천둥 번개까지 동반한 봄비에 동면 중이던 생물들이 꿈틀거린다. 혹독한 추위를 견딘 목련의 겨울눈도 솜털처럼 보드라워지고 지난가을 냉정하게 묵은 잎 떨구었던 자리에선 새 잎눈이 튼다. 아픈 이별점 위에서 다시 새 인연이 싹튼다.

삼월이 되니 아파트 단지에도 겨울 가고 봄이 오듯 묵은 인연이 떠나고 새 인연이 온다. 버려진 가구들은 훈장처럼 딱지를 붙인 채 하루 이틀 재활용코너를 쓸쓸하게 지키다 사라진다. 새로 이사 오는 사람들이 인테리어를 바꾸면서 뜯겨져 나온 삶의 흔적들. 며칠 전까지 온기를 담고 있던 마루며 타일 벽지들은 쓰레기가 되어 자루에 담겨 나간다. 그리고 지워진 그 자리엔 새 삶이 시작된다.

우리 앞집도 그렇게 떠났다. 나와 비슷한 연배였던 앞집 여자는 눈이 예쁘고 선한 사람이었다. 그네가 이사 왔을 때도 서로 인사를 나누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출퇴근 시간이 달라 마주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가끔 상추나 고추가 검은 봉지에 담겨 현관문에 걸려 있기도 하고 수박이나 호박이 놓여 있기도 했다. 인사를 하려고 벨을 누르면 그 집이 조용했고 차 한 잔 하려고 그네가 벨을 누르면 우리 집이 조용했다. 어쩌다 엘리베이터나 분리수거장에서 마주치면 반가워 묵은 감사인사를 나누고 밀린 수다를 떨었다. 그 집엔 하얀 말티즈가 한 마리 있었는데 이름이 `대박'이었다. 왈왈 짖다가도 “대박아”부르면 갸르릉 기분 좋은 소리를 내던 녀석. 왠지 그 집이 잘 되라는 주문 같아 정이 들기도 했는데.

어느 날 늦은 저녁 돌아와 보니 현관에 제과점 종이가방이 걸려 있었다. 갑작스레 사정이 생겨 이사를 간다고. 인사 나누지 못하고 떠나 서운하다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순간 너무나 당황스럽고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갑작스럽게 일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관심을 가졌더라면 기미를 눈치 챌 수 있었을 텐데. 전화번호라도 알 수 있을까 부동산에 물어보았지만 떠난 지역만 대강 알려줄 뿐 개인정보 보호라며 더 이상은 함구했다. 현관 옆 가스 검침 기록부에 쓰인 동글동글한 숫자들이 그 가족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그런데 한동안 비어 있던 집에 다시 사람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수리를 하는지 건축 자재들이 들어오고 뚝딱거리는 소음이 며칠 계속되었다.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새 주인과 마주쳤다. 어린 아이들이 있는 젊은 부부였다. 그들이 이사 온다는 날짜가 지났는데 이사를 온 건지 안 온 건지 앞집은 너무나 조용하다. 오래전에는 이사한 집을 방문할 때 성냥이나 양초를 선물했다고 한다. 불은 정화를 의미하기도 하고 재화를 지켜주고 모든 일이 불꽃처럼 잘 이뤄지길 빌어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요즘엔 주로 좋아하는 화초를 선물하거나 세제나 휴지를 선물한다. 달라진 문화에 따라 종류는 달라졌지만 부정을 없애고 잘되길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다. 겨울과 이별하는 봄 머리에서 덕담한마디 해주지 못하고 그네와 이별한 게 내내 미련이 남아 우연이라도 마주치길 바라는 마음도 간절하다. 묵은 먼지를 떨어내며 떠난 이웃도 새 이웃도 봄날처럼 따뜻하고 행복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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