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안희정의 경우
악의 평범성. 안희정의 경우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8.03.0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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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엊그제 내린 비로 무심천 지류인 율량천에 남아 있던 잔설마저 다 녹아 사라지고 말았다. 봄은 물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다. 겨우내 얼었던 몸이 풀리고 비로소 흐르는 물의 소리가 커지는 것이 느껴지는 신새벽, 유력 대권주자였던 안희정의 몰락을 생각한다.

미투, 위드유의 봄은 이렇듯 걷잡을 수 없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한나 아렌트의 충격도 처음에는 그랬다. 히틀러에 의해 학살된 유태인은 600만명에 달한다. 그 잔인한 범죄의 한복판에 서 있는 나치스 친위대 중령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에서 망명한 미국의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해 충격적인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만행을 일으킨 당사자 아이히만이 `악의 화신'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주장은 그만큼 충격이었다. 보통의 인간들은 아이히만의 악행이 `악마성'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믿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히만이 지극히 평범한 가장이었으며,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모범적 시민이었다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은 보통사람들의 상식을 깨트리는 고통이었다.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한 이후 15년간 숨어 지내다가 1960년 체포된 뒤 예루살렘의 전범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62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죽었지만 재판 과정에서의 그의 진술은 `인간'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그는 학살을 저지를 당시 법적 효력을 갖고 있는 히틀러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어떤 잘못도 느끼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심지어 자신이 받은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는 대답도 숨기지 않았다.

안희정이 저지른 짓을 새삼 언급하는 일조차 추잡스럽다. 그는 영광스러웠던 충남도지사직을 내려놨고, 모든 정치 활동을 중단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는 사법처리의 대상이 되는, `인간'으로서의 철저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될 처지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번 일이 어디 그것만으로 끝날 일인가. 한 때나마 그를 지지했고, 그에게 열광했던 수많은 국민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배신감은 어쩔 것인가. 속담처럼 아무리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해도, 자기 안에 감춰진 `악마성'을 철저하게 숨기고 지도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이상 우리는 `감히 어디서'를 말하며 치를 떨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나마 지금이라도 그의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날 수 있게 한 이 땅의 가녀린 여성들의 용기에 놀란 가슴을 쓸어 담으며 찬사를 보낸다. 굳이 도덕성을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적어도 강한 놈한테는 철저하게 강하고, 약한 이들에게는 한없이 약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기를 원한다.

안희정. 그는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으로는)적어도 한 여성의 인간적 존엄성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거기에 뒤따르는 쓸데없는 음모론조차 일종의 희망을 놓쳐버린 간절함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미투의 당찬 용기와 위드유의 격려를 뛰어넘어, 이제는 숨죽이고 있을 잠재적 가해자인 남성과 권력의 반성과 고백이 불가피한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도 잘 알고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으니 회개하고 반성하며 권력을 향한 탐욕을 내려놓아야 한다. 피해자와 가해자로 구별하면서 서로 대치하는 구조로는 봄을 기대할 수 없다. 아무렇지도 않은 권력과 폭력은 이 세상엔 없다. 그 아무렇지도 않다고 여기는 권력과 젠더 윤리, 그리고 폭력적 지배로 인해 어떤 인생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에 신음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또한 어질러진 과거(적폐)청산이며, 미래로 나아가는 희망이다.

“그때 말할 수 없었던 것을 이제라도 말해줘서 고맙다”고 손을 내밀어야 하고, “그때 내가 잘못했다”고 고백하며 평등과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안희정이 없다고 우리의 희망마저 빼앗길 수 없다. 미투의 봄은 물처럼 도도하게 흘러 더 깊고 찬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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