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의 경지
매화의 경지
  • 김태봉<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8.03.05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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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마냥 가지 않고 있을 것만 같던 겨울도 때가 되면 서서히 사라지면서, 어느덧 봄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수십 년을 살다 보면 이 변함없는 현상을 모를 리 없지만, 그래도 겨울의 끝자락은 길고 힘들게 느껴지기 쉽다. 바로 이때 소리 없이 나타나 겨울에 지친 사람들을 위안하고, 봄이 곧 온다는 안도감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 바로 매화다.

겨울은 끝자락이라고 해서 결코 나긋나긋하지 않지만, 매화는 그것을 무릅쓰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어 예의 붉고 흰 꽃을 피우고, 은은한 향기를 발한다. 그래서 매화는 인고(忍苦)와 희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 왔고, 이러한 매화를 닮고자 많은 사람이 노력해 왔다. 남송(南宋)의 시인 사방득(謝枋得)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무이산 속에서(武夷山中)

十年無夢得還家(십년무몽득환가) 십 년을 집에 돌아갈 꿈도 못 꾸고
獨立靑峰野水涯(독립청봉야수애) 푸른 산과 들판 물가에 홀로 서 있네
天地寂寥山雨歇(천지적요산우헐) 산 비 그치고 천지는 고요한데
幾生修得到梅花(기생수득도매화) 몇 생을 닦아야 매화에 이를 수 있을까


시인은 북방 세력인 원(元) 나라의 침략으로 송(宋) 나라가 남쪽으로 내몰린 채 겨우 명목만 이어가던 시기에 삶의 대부분을 살아야 했던 비운의 인물이다. 시인은 자신의 조국인 송(宋)의 조정에서 봉사(奉仕)하고 싶었지만, 외세의 침탈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무이산(武夷山) 속에서 홀로 은거하며 긴 세월을 지내야만 했다. 보통 깊은 산 속에 은거하는 것은 벼슬살이와 같은 세상의 속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발적 의지로부터 말미암지만, 시인의 경우는 이와는 달리 강제적 은거였던 셈이다. 그래서 시인은 한가함과 자유를 구가하는 보통의 은자(隱者)들과는 달리 울분과 절망 그리고 고독을 겪으며 깊은 산 속에서 사실상 유폐 생활을 해야만 했다.

십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집에 한 번 가지 못했다거나, 산과 물가에 홀로 서 있다거나 하는 표현들은 시인의 처지를 잘 보여준다. 사방은 고요하기만 하고 내리던 비마저 끊긴 것은 시인의 고독이 절정에 이르렀음이다. 이때 구세주처럼 시인 앞에 나타나 희망을 주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매화이다. 혹독한 겨울을 묵묵히 견뎌내면서 끝내 향기를 발하는 매화의 기품을 지니지 못한 것을 탄식하지만, 그것은 기실 탄식이 아니고 희망이다.

유구한 역사의 관점으로 보면, 사람이 사는 것은 한순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순간이 고통과 좌절 그리고 고독으로 점철된 것이라면 한없이 길게 느껴질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아야만 했던 비운의 사람들을 위로한 것은 다름 아닌, 만고불변의 자연이다. 그 중 겨울의 끝자락에 홀연히 나타나는 매화야말로 비운의 삶들에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이었음이 분명하다.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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