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와야 하는 이유
봄이 와야 하는 이유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8.02.27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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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1. 살아오면서 여태껏 나는 단 한 번도 지하주차장이 두렵지 않았다. 차를 타면 맨 먼저 차 문을 잠그는 일이 없었고, 지하 주차장에서의 사람 기척에 놀라 차에서 내리는 일을 망설인 적도 없었다. 집까지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사람이 있으면 꺼렸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일도 없었다. 혹시 사람을 피해 힘겨운 계단을 택하다가도 갑자기 사람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게 되면 소스라치게 놀라 다시 뛰쳐 내려올 일도 없었다.

밤중에는 밖으로 돌아다닐 엄두를 내지 못했으며, 만에 하나 밤 외출이 불가피한 경우, 멀리 돌아가더라도 최대한 밝은 길을 택해야 하는 일도 없었다. 그나마 뒤에서 사람이 따라오는 기척이 있으면 뜀박질하듯 발길을 서두르는 일도 없었다. 주변 사람이 온통 흉기로 변한 듯한 세상에서 내 딸들과 아내, 그리고 누이이며 여동생이어야 할 여성들의 치열한 두려움을 나는 여태 신경조차 쓰지 못하고 있다.

공격을 당하면 바로 응징을 하고, 또 그럴 힘조차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당연히 경찰에 신고하면 되는 세상인줄 알았다. 그리하여 아무리 절대 권력이라 해도 나에게 피해를 입히는 못된 행동을 참지 못하는 일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로 인해 무리에서 버림받거나 몸과 마음이 망가지더라도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는 세상의 위험이, 그동안 이 땅의 여성들에게 흔한 일이었음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며 살아왔다. 더 참담한 일은 그동안 내 주변에도 여성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그저 성적 노리갯감이거나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는 <괴물>이 도처에 있었을 것임을 전혀 경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더, 더, 몹쓸 일은 나 역시 그런 일에 무신경했거나, 용감하게 제지하면서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두 딸의 애비인 주제에...



#2. 나는 요즘 TV를 보면서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짐은 물론 자주 눈물을 흘린다. 친한 후배에게(의사는 아니다) 증상을 말했더니, 형이 늙어서 그렇단다. 하얀 옷을 입고 손에 손마다 한반도기를 흔들며 평창 올림픽 개막식에 입장하던 선수들을 보고 눈물을 흘렸고, 경기 내내 이기지 못하는 설움에도 굴하지 않는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의 투혼에도 눈시울을 붉혔다. 급기야 이들이, 헤어져야 하는 버스 앞에서 부둥켜안은 몸을 풀지 못하면서도 서로에게 “울지마”라고 외치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할 때, 나도 울었다.

그리고, 일단의 정치인들이 남과 북이 통하는 길을 막아서며 평화를 외면하는 장면을 보면서도 또 다른 의미로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어쩌지 못하고 말았다.

남과 북녘의 젊은 선수들이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을 기약할 수 없고, 냉전과 분열, 그리고 선거를 앞두고 오로지 북한을 이용해 작게라도 살아남으려는 정치집단의 모습을 여태 봐야 하는 현실이 참으로 눈물겹다.



#3. 이 땅의 여성들. 그리고 지금 들끓고 있는 `미투(Me Too)'와 `위드유(With You)'는 단순히 <괴물>로 분류되는 특정한 나쁜 인간들의 추잡한 욕망에만 국한된 분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성적 착취 및 노리개의 대상으로 여성을 위치시키는 이 땅의 왜곡된 남성 지배 중심의 구조에서 비롯된 나쁜 성문화의 광범위성에 더 큰 문제가 있다.

가해자는 별다른 죄의식을 갖지 못하고 있는데, 정작 피해자는 숨죽여야 하는 불편과 부당함이 만연한 세상에 봄이 온다고 뭐 그리 좋아질 일 있겠는가.

우리가 지금 눈부신 경제 성장과 성공적인 동계올림픽 개최를 떳떳하게 찬양할 수 있는가. 해방 이후, 그리고 분단 이후 지금껏 반성다운 반성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처지에 평화와 번영이 무슨 소용인가.

지금은 다만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할 때. 헤어진 남과 북의 모든 청년들은 물론, 이제 자신은 무리에서 쫓겨날 것이고, 망하게 될 것을 예상하면서 떨리는 두려움으로 `미투(Me Too)'를 절규하는 이 땅의 딸들에게도 손을 잡아줘야 하는...

그리하여 이 땅에 진정한 봄이 와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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