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 수정
궤도 수정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8.02.27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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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최명임

선글라스를 끼고 꽃무늬 청바지를 입은 그녀에게서 신선함이 뚝뚝 떨어진다. 또 한 사람, 그녀도 목하 갱년기 증후군을 앓고 있다. 가슴에 이글거리는 불을 끄기 위해 엄동설한에 창문을 열고 선풍기를 켜놓고 잠을 잔다. 그녀들의 들뜬 기분이 내게도 전해진다. 피붙이인 듯 남인 듯 소통이 안 되는 날도 있지만, 그녀들과 함께하면 가슴 뜨거운 날이 더 많다.

세 여자의 일탈은 갱년기의 공허함을 메워보자고 작당한 일이지만, 셋째 동서를 위한 이유가 더 컸다. 그녀는 일여 년을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살았다. 가슴에서 불이 나면 맥주 캔을 따고 수없이 밥을 굶었다. 그러다 감정을 주체 못 하면 벽에다 머리를 박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불면의 밤을 보낸다는 그녀의 얼굴에서 절망감이 느껴졌다. 연노랑 원피스를 입고 개나리꽃같이 고운 모습으로 첫인사를 왔던 그녀가 중년의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제주는 삶을 걷어차고 싶을 때,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 화기가 엄습할 때 사람을 달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녀에게도 그랬으면 좋겠다. 불을 뿜어대던 혼돈의 땅이 화기를 잠재우고 제주를 형성하였으니 그런 연고로 생겨난 섬이라 그 아량이 여느 뭍과는 사뭇 다르다.

천성이 아름다운 섬 이야기를 찾아 나선지 한나절, 긴 듯 짧은 듯 하루를 보내는 동안 세 여자는 어느새 일탈한 모습이다. 엄마도 아내도 아닌 순수 그녀들이다.

바다를 마주하고 섰다. 칼바람이 몰아친다. 이 무법자는 바다만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마저 뒤흔든다. 그녀들이 네 활개를 퍼덕이며 모래밭을 날아다닌다. 바람은 괴성을 읽어들이다 비명을 지른다. 화기의 분출이다. 끝내 허물을 벗고 나온 매미의 신선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바다는 늘 평온하고자 하나, 바람은 난데없는 파도를 앞세워 용트림한다. 바람은 분출하는 용암을 보았을까. 킬러의 서늘한 눈빛으로 육중한 파도를 달고 와 섬을 삼키려 든다. 철옹성 같은 섬을 마주하고는 이내 스러지는 불 같은 욕망이다. “저 혼란 속으로 들어가면 어찌 될까. 하였더니, 죽음이죠.”라고 한다. 바람을 통제하고 살아내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그녀들의 가슴앓이는 바람이다. 삶의 궤도를 수정하고픈 성장통이다. 이룰 수 없는 것,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욕구가 파도처럼 달려들다 부질없는 것임을 깨달아 버리면, 욕망은 제주 섬 뿌리를 흔들다 지쳐버린 바람처럼 해체되어 버린다.

파도는 어쩌자고 변함없이 들이닥칠까. 가속도가 붙으면 살기가 느껴진다. 무심한 바위로 격하게 달려들다 산산이 부서진다. 욕망으로 부딪혀와 그로 인하여 부서지는 미욱한 인간처럼….

제주 섬의 바위도 한때 이글거리는 불길이었다. 무작정 내달리다가 어느 순간 저를 내려놓고 선정에 들었다. 그래서 바람이 들어찰 여지가 없다. 텅 빈 가슴을 드러내고 불언지교를 하고 있다.

그녀들이 드디어 칼바람을 받아치고 있다. 파도를 향해 소리치고 있다. 바람과 파도와 길항작용이 일어나면 분명 그녀들의 가슴에도 상쇄되는 무엇인가 흘러내릴 것이야. 그러면 그녀들의 가슴도 빈 곳이 생겨날 것이야. 턱없이 몰려온 파도가 하얗게 부서진다.

그녀들이 숨을 헐떡거리며 웃고 있다. 팍팍한 삶의 피각이 뚝뚝 떨어진다. 심드렁해진 바람이 돌아가려나. 잦아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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