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순<수필가>
  • 승인 2018.02.27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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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 김경순

운동을 시작했다. 이상하리만치 밥맛이 좋아 당기는 대로 먹다 보니 체중도 함께 비례해 늘어났다. 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귀찮아지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오른다. 안 되겠다 싶어 헬스장을 찾아 3개월치를 지불했다. 그동안 등산이나 하천변을 돌며 조깅하듯이 하는 운동은 많이 해 보았다. 하지만 돈을 지불하고 하는 운동은 처음인지라 굳게 마음을 먹고 시작을 했다. 첫날은 트레이너에게 운동하는 순서와 방법을 배웠다. 본격적인 운동에 앞서 호흡법을 알려 준다. 하지만 그 호흡법이라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 숨쉬기인 듯 보이지만 실상, 숨쉬기를 잘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요즘 깨닫는다.

운동할 때의 호흡 요령은 힘을 줄 때는 날숨으로 하고, 힘을 뺄 때는 들숨으로 해야 한다. 만일 숨을 반대로 쉰다면 복압이 증가하면서 혈압이 올라간다. 고혈압 환자나 나이 든 사람은 자칫 위험 할 수도 있다. 호흡은 체내에서 생성된 이산화탄소를 날숨으로 내뿜고, 신선한 산소를 들숨으로 들이마시는 행위이다. 숨을 충분히 내뱉지 못하면 폐 속에 이산화탄소가 남게 되어 공기를 마실 때 산소가 몸속 깊이 들어오지 못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나는 힘을 줄 때는 버릇처럼 숨을 멈추게 되고, 기구에서 힘을 뺄 때는 어김없이 나도 모르게 숨을 내쉬곤 했다. 그러다 보니 운동기구의 사용법보다는 호흡법에 신경을 더 쓰게 되었다. 나중에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들숨과 날숨만 잘 쉬어도 스트레스가 해소된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나는 `숨쉬기'가 지독한 스트레스였다.

`숨'은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들이쉬고, 내쉬고 이것은 단순한 호흡이면서도 우리의 삶과도 직결된 운동인 셈이다. 쓸 만큼 가졌으면 버릴 만큼 버리라는 말이 있다. 한번 들숨으로 마신 공기는 다시 날숨으로 뱉어내야 하는 것이 이치이다. 그 누구도 이것을 거스르게 되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마치 세상살이와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들숨'이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안으로 채워야 할 욕심의 장치라면, `날숨'은 가득 채워진 마음 안에서, 쓰고 남은 찌꺼기를 내보내야 하는 과정의 장치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때문에 마음 안에 쌓인 욕심의 크기만큼 버려야 할 것들은 더 많을 것이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들숨을 쉬었는지 되돌아본다. 내가 가진 것이 남보다 더 작은듯하여 탐닉하고, 그것을 갖기 위해 노력이라는 말로 치장을 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쉰다'라는 표현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에서 파생된 개념이다. 그렇듯 우리의 삶도 들숨과 날숨이 함께 공존해야 하는 이치임에도 나는 아주 쉬운 것도 모르고 살아왔다. 이제 나도 긴 날숨을 쉴 수 있도록 연습을 해야겠다. 헌데 가진 것만큼 내 쉬어야 할 텐데 걱정이다. 사실은 내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쌓여 있는지도 가늠을 할 수가 없다.

복근 운동 기구에 누웠다. 날숨을 뱉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곧이어 다시 들숨을 쉬며 눕는다. 그때 뒤에서 트레이너가 한마디 한다. 힘을 빼는 들숨은 천천히 해야 뱃살을 빼는데 더 효과가 있다고. 다시 힘을 내서 깊은 날숨으로 상체를 일으키고 들숨으로 천천히 몸을 눕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랫배의 두께살에서 통증이 전해져온다.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슬그머니 손도 가져다 대본다. 이렇게 잠깐의 운동임에도 나는 지금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헐떡이고 있다. 그러다 이내 만져지고 보이는 두께살보다 더 두꺼운 것이 내 안에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두렵기까지 했다.

운동을 마치고 7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다본 시내가 어둠에 잠겨 있다. `세상은 지금 천천히 들숨을 쉬는 중, 해가 밝으면 도시는 다시 날숨을 쉬며 힘차게 살아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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