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내려준 최고의 선물, 그리움
신이 내려준 최고의 선물, 그리움
  • 임현택<수필가>
  • 승인 2018.02.26 2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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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임현택

길이 끝난 곳에 길이 있었다. 오랜 칩거생활을 박차고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상당산성 앞에 섰다. 고개를 젖히고 바라본 단청, 하얀 눈에 반사되어 더욱더 선명한 색상은 화장을 막 마친 여인의 얼굴처럼 상큼하고, 한입 베어 물면 파란 물이 쏟아질 것 같은 파란 하늘빛이 얼굴 위로 날아든다.

유난히 추운 올겨울, 한파 속에도 많은 인파로 산성주변은 북새통이다. 그 아름다운 산성저수지는 꽁꽁 얼어붙었고 추위를 먹고산다는 고드름이 처마 끝에 힘겹게 매달려 있다. 한낮이 되면서 제법 따스한 햇볕이 지붕 위에 내려앉자 낙숫물 음률이 박을 타기 시작한다. 살얼음 바닥은 이내 보조개처럼 깊은 홈이 파이기 시작하면서 포물선에 자연음향까지 아름다운 하모니다.

아이들이 유치원 다닐 때 첫 산행이 상당산성이었다. 퇴색된 단청만큼 오랜 시간이 흐른 오늘, 그때 기억을 더듬으며 아이 발자국이 찍힌 눈 위에 내 발자국도 찍어본다. 천년고도의 위용을 드러내는 산성 남문인 공남문으로 들어서면서 흔들리는 동공, 두 날개를 활짝 펼친 수호신 주작 한 쌍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좋은 징조를 기원해 본다. 너른 송판을 잇대어 만든 홍예개판 주작은 세월흔적을 따라 희끗희끗 퇴색이 되어 있음에도 우리네 염원을 간직한 듯 온화하다.

세월의 무게만큼 검게 변한 성벽, 산성의 굴곡 포곡 식 곡선미는 최고의 미학이다. 한겨울임에도 가을과 겨울 그리고 여름이 공존하고 있는 듯한 산성, 햇볕이 잘 드는 성벽 아래 나뭇가지 끝에 간간이 매달려 있는 낙엽들 사이로 잔가지가 부딪치는 소리는 사각사각 눈 밟는 소리가 나고, 모롱이 응달에 자리매김한 하얀 눈은 다소곳이 겨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반면, 성벽 위에는 사시사철 위풍당당하게 푸름을 자랑하는 소나무가 그 자리 그곳을 지키고 있으니 산성은 애면글면 사계를 품는 곳이다.

미끄러지면서 걷다 보니 암문, 몰래 드나드는 작은 사잇문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같은 아이들이 석벽에 기대어 깨금발 들고 두 손을 번쩍 들어 키 재기 하고, 사잇문을 드나들면서 서로 꼬리잡기를 하며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귓전에 맴돌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찬바람이 이는 차디찬 사잇문을 어루만져본다. 눈을 감아본다. 그때 아이들이 뛰어다니던 모습과 사잇문이 적에게 발각되면 안쪽에서 돌과 흙을 쌓아 막음으로써 성안을 보호했다는 설에 묘한 전율이 인다.

파란 하늘이 더없이 좋은 날이다. 성벽 안쪽은 따사로운 햇살로 언 땅이 녹으며 신발에 흙이 달라붙고 금방 질척해진다. 예전의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커다란 나무막대기를 다듬어 지팡이를 만들었다. 작대기를 지팡이 삼아 땅을 짚으며 걷자니 엉거주춤 작대기를 들고 할아버지 흉내를 내던 아이가 또 스쳐 지나간다. 여전히 지나간 시간이 순서 없이 뒤섞여지면서 허공에 맴돌 뿐 잡히지 않는 시각, 높은 곳에 올라 조망하니 산성의 아름다움이 도드라져 매료된다. 전쟁의 생과 사 갈림길에 서 있던 이곳, 그럼에도 훗날 수려한 산세에 탄성을 내지르며 문인들이 풍류를 즐겼을 것 같은 이곳, 굽이굽이 굴곡진 선의 미학에 발걸음이 멈춰진다.

해가 까묵까묵 넘어가고 있을 무렵 산성을 돌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두런두런 사람들의 이야기꽃은 끊이질 않고 가끔 옛일을 회상하는 너털웃음이 허공에 맴돌다 사라진다. 그리움은 신이 내려준 최고의 선물이다. 엉거주춤 깨금발 들며 서로 등을 맞대고 키 재기 하던 모습들, 추억은 머리에 남고 가슴에 남는다더니 화수분처럼 피어오른 묵혔던 추억들을 꼭꼭 여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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