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람우암(4) 기호학파
큰 사람우암(4) 기호학파
  • 강민식<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 승인 2018.02.25 19: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시선-땅과 사람들
▲ 강민식

지역에 대한 별칭이 있다. 경상도를 영남(嶺南), 강원도를 관동(關東)이라 부르고, 달리 영동(嶺東)과 영서로 나눈다. 넘나들던 고개가 기준이다. 백두대간 높은 산줄기 속 여러 고개가 있으니 그러려니 한다. 우리 지역은 호서(湖西)라 하고, 전라도는 호남(湖南)이라 한다.

그렇다면 그 가름이 되는 호(湖)는 어디일까? 의림지, 벽골제, 금강 등 여럿을 꼽는다. 그러나 우리 땅이름을 중국에서 따온 것이 많으니, 후베이[湖北], 후난[湖南]을 참고하면 좋을 듯싶다. 서울 바깥 남쪽 지역에서 찾을 수 있으나, 굳이 영남 사람들은 호동(湖東)이 아닌 낙동(東)이라 한다. 낙()은 낙양에서 유래한 서울의 별칭이다. 그곳 사람들의 아집인가.

호서는 충청도의 별칭으로 익숙하다. 오늘날도 호서문화권이라 부르니, 고대적 전통이 강한 중원문화와도 일부 겹치거나 독립적이다. 그 호서지역은 조선시기 예론(禮論) 학통을 꽃피웠다. 조선의 성리학은 창업기를 거쳐 사림이 주도하며 이기(理氣) 논쟁으로 자리 잡았다. 이기 논쟁이 당쟁과 겹치며 사림은 동인(東人)과 서인으로 나뉜다.

영남학파가 동인을 이끌었다면, 서인은 율곡 이이(1537~1584)와 우계 성혼(成渾, 1535~1598)이 첫 자락에 섰다. 훨씬 시간이 흘러 율곡 이이의 학통을 이어받은 제자들이 노론으로, 우계 성혼의 먼 후예들이 소론을 이뤘다. 영남학파는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의 문인들이 북인을 이루고,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 남인을 이루었다. 4색 당파는 성리학의 정착과 발전, 그리고 현실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부터 출발하였다.

경기 파주에 가면 이이와 성혼의 묘소가 가까이 자리하고, 율곡이 한동안 머물렀던 해주 석담도 먼 거리가 아니니 이곳도 의미가 남다르다. 한편 도성[京]과 그 바깥을 도넛처럼 감싸는 기(畿)를 합쳐 경기라 한다. 율곡의 학통은 충청도 연산 땅 김장생, 김집 부자로 이어지고 또 그 적통을 `그'가 이으니 합쳐 기호(畿湖) 학파라 부른다. 그리고 일찍부터 관직에 나아갔던 사림들의 고향이기도 했다. 기묘사화(1519) 때 화를 당한 기묘명현(己卯名賢)들의 거처가 대부분 이곳이다. 기호학파는 영남학파와 더불어 크게 서인과 동인으로 나뉘어 학파와 정파로 자리 잡았다.

지금의 논산시는 옛 연산현, 은진현, 노성현, 석성현 등 네 현을 합친 곳이다. 호서의 끝자락이다. 옛 노성현의 터전인 노성면엔 후일 소론을 이끈 윤증의 고택과 파평윤씨 선대를 모신 노강서원(岡書院)이 있다. 윤증 묘소 또한 고택 바로 북쪽 20여 리 떨어진 공주시 계룡면 향지리에 있다. 한편 이이로부터 적통을 이어받은 사계 김장생(長生, 1548~1631)의 묘소는 옛 연산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고, 묘소로 들어오기 직전 국도 1번 가에 돈암서원(遯巖書院)이 있다.

돈암서원은 1634년(인조 12) 김장생을 주향으로 하여 세운 후, 1660년 사액을 받았다. 1880년 원래의 자리가 낮아 홍수 피해를 당하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서원 안쪽을 들어서면 서쪽으로 사액 편액을 안쪽에 건 보물 제1569호인 응도당(凝道堂)이 번듯하고, 묘정비와 강당, 그 뒤에 사당인 숭례사가 있다. 이곳 묘정비를 찬한 `그'도 1695년 함께 배향되었다.

돈암서원의 응도당이나 노강서원의 강당은 청주향교 명륜당과 같이 맞배지붕 아래에 튀어나온 눈썹지붕이 독특하다. 노강서원과 돈암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명맥을 유지한 47개 서원에 속한다. 각기 호서지역 소론과 노론을 대표하는 서원이었기 때문이다. 경기 북쪽에 연원을 둔 기호학파의 흐름이 호서 끝 연산을 거쳐 다시 동쪽으로 향하기 직전 잠시 머문 곳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