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눈사람
  • 김기자<수필가>
  • 승인 2018.02.19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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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기자

골목길에서 눈사람을 만났다. 가게 앞에 떡 하니 서 있는 모습이란 그야말로 제대로 된 문지기처럼 건장하다. 마주하며 인사라도 나눌 듯 걸음을 멈추고 요모조모 재미있게 바라본다. 눈, 코 잎, 거기다가 모자까지 멋스럽다. 오가는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당기고 있으니 어찌 그냥 지나치랴. 나도 모르게 한참을 서 있어야 했다. 어느 생명이 부활한 것 같은 묘한 착각과 함께.

날씨가 조금은 포근해졌다. 다시 눈사람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흠칫 놀라고 말았다. 며칠 전만 해도 풍채 우람하던 모습은 간데없고 작아지고 있는 게 아닌가. 얼굴은 녹아내리기 시작해 울퉁불퉁하다. 두고두고 원형 그대로를 고집할 순 없지만 그래도 왠지 짠해 왔다.

머릿속에 섬광이 스친다. 삶의 또 다른 단면을 보고야 만 것이다. 모든 생명이 스러지고 처음의 때로 돌아가는 듯한 광경을 보는 기분이었다. 나이가 많아 병약해져서 떠나는 사람, 젊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삶을 떠나는 사람의 얼굴이 이런 걸까 싶기도 했다. 그리고 일그러지며 녹아내리는 과정은 아픔으로 비추어졌다. 우리의 생명과 모든 인연도 이렇게 차츰 이별의 시작으로 걸어가는 중은 아닌지 갑자기 허망해지기까지 했다.

점점 작아지는 눈사람의 얼굴을 보며 부모님이 떠올랐다. 노환으로 계실 때의 마지막 모습이 마치 저 상황이었지 싶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때가 지금 저기에 서리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물로 변하여 간다는 것, 그것이 또 다른 곳에서 부모님과 합류하게 될 만남은 아닐는지 은근한 기대감마저 생긴다. 더불어서 많은 인연과의 관계까지도.

언젠가는 우리도 소중한 것들로부터 멀어져 간다. 눈사람의 형태처럼 삶 전체가 녹아지듯 약해져만 갈 것이다. 많은 미련과 아쉬움이 따르겠지만 시간을 거스를 순 없다. 그 모습을 보며 생의 마지막 장르에서 아파하지 않고 홀가분하게 떠날지 조심스러워진다. 정말 그때에 이르러 초연해 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에는 눈사람을 보면 그저 흥미롭기만 했었다. 이제는 아니다. 녹아지는 과정을 보면서 어떤 연민이 깊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대로이길 바라는 또 다른 애착이 아닌지 모르겠다. 버리고, 두고 가야 할 것, 그 모든 것들이 아직도 내 안에서 서툴게 남아 있음을 감출 수 없다.

눈사람이 무슨 말을 할 것만 같다. 눈으로 뭉쳐온 삶의 여정을 꺼내어 보이는 듯하다. 눈의 본질은 차가웠을지라도 한 겹 한 겹 몸집을 키울 때는 삶 속에서 뜨거운 열정이 스며 있었으리라. 어느새 생각의 주머니가 묵직해 온다. 눈사람의 형체가 물로 변할지라도 그동안 걸어온 길이 헛되지 않았음을 헤아려주고 싶다. 물론 나도 남은 인생을 그렇게 가야 하겠지만.

겨울 풍경 속의 느린 여운이 눈을 뜨게 한다. 비록 스러져가는 눈사람일지언정 바라볼수록 인내와 사랑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조금씩 나 자신도 변화되는 시간이다. 녹아지는 것은 아픔과 후회의 몸부림이 아니며, 새로운 생명으로 승화되어가는 돌아봄의 시간이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거대한 겨울은 이제 조금씩 밀려가는 중이다. 봄의 발자국 소리가 가깝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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