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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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8.02.13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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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시내버스 카드 잔액이 겨우 800원이 남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아침 출근길. 되돌아 승용차를 끌고 눈길을 헤치고 달려 겨우 지각을 면할 수 있었다. 이런 무심함에서 비롯되는 당혹스러움이 새삼 애잔하다. 버스카드조차 제때 충전하지 못할 만큼 늘 쫓기듯 살면서 내가 세상을 버텨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토록 준비 없이 허둥거리며 내가 기필코 지켜야 하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유난히 길게만 느껴지는 한파와 폭설의 겨울 끝자락에 설날은 어느 사이 야금야금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달걀지단을 부치는 딸내미에게 “지단(지네딘 지단: 프랑스의 전 축구선수)은 은퇴했는데...”라는 농담을 건네다가 이내 썰렁한 `아재'라는 빈축을 사고 마는, 우리 아재들에게도 설날은 어김없이 다가오고 있다.

설날이 손꼽아 기다려지거나 설레던 시절이 아득하다. 생활인으로, 가장이며 가부장이라는, 부양과 가족의 마초적 지배자로서의 가파른 벼랑길을 걸어야 하는 숙명. 아재들에게 설날은 언제부턴가 부담이 지워지지 않는 어지러움일 뿐이다. `까치 까치 설날'은 동요 속에나 있고, `색동저고리' 또한 빛바랜 민화에나 등장할 법한 전설이 되고 있는 사이, 아재들의 설날은 누구든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서러움이 있다.

설날이 되면 모두들 들뜬 마음으로 새해를 다짐하는 사이, 누군가의 아들이며, 또 누군가의 형이거나 오라비, 누군가의 남편이며, 그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는 아재들은 벗어나지 못하는 삶의 무게와 씨름하고 있다.

속절없이 아재가 되어버린 우리도 한때는 세상을 지배하거나, 아니면 큰 바다를 항해하는 마도로스, 혹은 음악가이거나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도는 여행가가 되는 꿈을 지닌 적도 있었다.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거나, 은근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푸른 희망을 새기거나, 군인이 되어 혁명의 야망을 남몰래 가슴에 키워 왔던 이 땅의 아재들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그러나 지금, 눈 뜨면 기계처럼 시커멓게 옷을 갈아입고 잘 길들여진 짐승처럼 한꺼번에 직장엘 나와 점심으로 무얼 먹을까 몇 번이고 얄팍한 주머니를 뒤적이는 인간. 딸아이는 버릇처럼 별다방에 들러 일회용 테이크 아웃 잔에 우아하게 커피를 즐기고 있는 사이, 일터 근처 미지근한 싸구려 자판기 커피의 온기에 간신히 언 손을 녹이는 이 땅의 수많은 아재들. 그래도 한때는 독립군의 기개를 닮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이 땅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를 누비거나 맨 앞에서 화염병을 던지던 독재 타도의 투사. 그래도 한 때는 열사의 사막은 아닐지라도 `조국 근대화'의 열망을 온 몸으로 불사르며 밤과 낮의 구별 없이 장렬하게 청춘을 불사르던 산업의 역군.

그 안에 `나'는 없고 오로지 `우리'만 있는, 그 가슴 속에 한결같이 수신(修身)보다는 제가(齊家)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만 있던 우리의 아재들. 선거 때만 되면 이념이나 긍지, 혹은 미래 희망 대신에 당장 집값이 오르거나, 화려한 개발 논리에 순응해 맘과는 달리 보수정당 후보에 표를 찍고는 그래도 정당투표는 진보를 선택했다고 자위하는 서글픔. 그리하여 그대들 때문에 오늘날 이처럼 지독한 국정농단에 신음하고, 젊은이들에게는 헬조선이 되었으며, 따라서 있는 집 자식의 아비가 되지 못했다는 눈 흘김을 고스란히 피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아재들의 설날이 서럽다. 친가는 조금, 상대적으로 처가 쪽 행보는 갈수록 늘어나고, 자식들 교육을 앞세운 아내이자 애들 엄마의 성화에 숨죽이며 집은 오로지 다시 밝을 새 날의 직장을 위해 잠시의 수용소로 전락한 이 땅의 아재들.

설날이 그들에게도 설렘이 되는 날이 다시 올 수 있을까. 시인 김선우는 어쩌다 이런 노래를 하게 되었을까.

가출이 아닌 출가이길 바란다/ 떠나온 집이 어딘가 있고 언제든 거기로 돌아갈 수 있는 자가 아니라// 돌아갈 집 없이/ 돌아갈 어디도 없이/ 돌아간다는 말을 생의 사전에 지워버린/ 집을 버린 자가 되길 바란다/ 매일의 온몸만이 집이며 길인,// 그런 자유를...// 바란다, 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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