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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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윤미<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18.02.1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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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 박윤미

가끔 목적 없이 걷는 시간도 참 행복하다. 길을 가면서 가게 안도 들여다보고,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도 보고, 하늘도 올려다보고,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을 이어가기도 하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좀 보고. 이 세상이 얼마나 살만한 곳인지, 얼마나 평화로운지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다. 철학자들이 산책을 소중히 여긴 것이 이해가 간다. 여행은 세상을 산책하는 일이다.

지난겨울 딸아이와 둘이서 배낭을 메고 스페인의 몇몇 도시들을 헤매고 다녔다. 조금은 지친 몸으로 소박한 론다의 기차역에 내렸을 때, 마침 여우가 시집가는 날인 듯 따뜻한 바람에 실린 빗방울이 밝은 햇살 아래 힘없이 이리저리 날렸다. 숙소까지 10여 분이면 되는 거리니까 이 정도 빗속은 걸어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며 우비를 꺼내 배낭에 뒤집어씌웠다. 누구의 시선도 상관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느끼며 낯선 익명의 도시를 씩씩하게 걸었다.

론다는 고원 위에 세워진 작은 도시인데, 투우의 발상지로 유명하고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을 방문하는 여행자는 거대한 궁전과 성채, 화려한 성당들과 예술 작품들이 아니라, 누에보 다리를 보러 온다. 40년 공사 끝에 1793년 완공된 이 다리는 까마득한 절벽과 절벽을 이어주고 있는 것으로, 깊은 협곡을 사이에 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하고 있다. 누에보는 `새로운'이라는 뜻으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새로운 다리'인 것이다.

이렇게 까마득하게 깊은 절벽에 어떻게 다리를 만들었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든 걸작에는 시간이 담겼다. 나는 다리를 건너 과거로 들어갔다. 구시가지를 가로지르고 올리브 농장 사잇길을 지나 협곡 아래에까지 가서 절벽을 올려다보니 다리 위에서 내려다볼 때만큼 까마득히 높았다. 저 멀리에 하늘과 대지가 맞닿은 선이 보이고 편평한 대지에 론다가 놓여 있다. 절벽을 만드는 한겹한겹의 지층이 인간이 살기 훨씬 이전부터 론다가 생성되는 시간의 기록이다.

해 질 녘에 나는 혼자 누에보 다리를 다시 걸었다. 침묵이 동행했다. 협곡은 노을빛에 대비되고, 조명을 받아 명암이 뚜렷해져서 더욱 극적인 모습으로 변신하였다. 그렇게 자연과 가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조합되어 그곳의 풍경을 닮은 일상적이고도 극적인 사진이 새겨졌다. 여행은 매 순간 낯선 것과 마주하게 되고 곧 익숙해지는 것의 연속이다. 순간의 이 작은 모래 한 알 같은 시선과 느낌이 나중에 어떤 의미로 남을지 누구도 모른다.

지층이 퇴적되듯 우리 삶의 매 순간 경험이 무심하게 쌓인다. 시간이 흐르면 지층의 약한 부분은 바람에 깎이고 물에 쓸려나가 단단한 부분이 남는다. 점차 굴곡이 극적으로 도드라지고 그 어디에도 없는 색다른 풍경이 된다. 추억은 사람의 가슴에 이렇게 남은 것들이다. 그 암반에 풀씨가 싹을 틔우고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 나무들로 점점 더 멋들어진 풍경을 만들어내듯이 추억은 처음의 경험보다 더 아름다워지고 특별해진다. 추억은 자연과 닮았다.

벌써 한 해가 지나 지난겨울의 추억이 되었다. 매일매일 걷고 또 걸었던 순간순간의 장면들과 그곳의 낯선 향기와 마음속 떨림까지 모두 생생히 떠오른다. 그 중 론다에서 만난 푸른 절벽은 고요한 명화처럼 마음에 남아있다. 세계 어디든 자유로이 걷고 싶은 욕망이 넘칠 듯 말 듯 출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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