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북한이 힘을 실어줄 때
이제는 북한이 힘을 실어줄 때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8.02.11 17: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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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 권혁두 국장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했다. 청와대에서 문 대통령을 만난 자신의 여동생을 통해서다. “빠른 시일 안에 만날 용의가 있다. 편한 시간에 방북해 달라”고 요청했고, 문 대통령은 “앞으로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켜가자”고 답했다고 한다. 조건부 수락을 한 셈이다.

성사되면 지난 2007년 10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을 만난 지 12년 만에 열리는 남북 정상회담이 된다. 얼어붙은 한반도 위기상황에서 남북 정상의 회동은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 꽉 막혔던 소통이 재개됨으로써 오해로 일어날 수 있는 우발적 사태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안전판을 확보한 것만으로도 성과다.

그러나 방북 제안에 문 대통령이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듯이, 정상회담 실현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통령은 북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서 북미 간 조기 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미국과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방북의 전제로 말한 `여건'이 무엇인지 확실해지는 대목이다.

문 대통령이 남북관계 발전의 필수조건이라고 밝힌 북미대화의 주제는 오로지 `북핵'이다. 그런데 북한과 미국은 이 문제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치하고 있다. 평창올림픽에 참석한 미국 부통령의 행보에서는 더 강경해진 미국의 입장이 드러났다. 그는 문 대통령이 각국 정상과 사절들을 위해 마련한 리셉션을 사실상 보이콧 했다. 헤드 테이블에 북한의 김영남 상임위원장 등과 동석하기로 돼 있었으나 자리에 앉지도 않고 떠났다. 미국 선수단과의 만남이 이유라고 했지만, 북한 대표와의 겸상을 거부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대화는 없다”는 경고를 북한에 재차 전달한 것이다.

일단 북한이 수위가 올라가는 국제사회의 제재와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한 돌파구를 찾기 시작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남한 정부를 디딤돌로 삼을 작정이었고, 평창올림픽에서 명분과 기회를 구했던 것이다. 올림픽에서 위장 평화공세를 펼쳐 한·미를 이간질하고, 대북 제재를 위한 국제적 공조를 흔들려 한다는 일각의 분석은 이제 설득력을 잃었다. 김정은이 기만적인 선전전만 펼칠 요량이었다면 친동생에게 친서까지 들려 특사로 파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상회담을 제안하며 사용한 `조속한 시일'이나 `편한 시간에' 등의 수사에서는 대화에 대한 적극성을 넘어 절박감까지 읽힌다.

미국은 마침내 북한이 제재를 감당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다고 판단한 것 같다. 궁지에 몰린 나머지 한국 정부를 발판삼아 자신들과의 대화를 시도하려는 의도로 보는 것이다. 좀 더 압박 강도를 높이면 스스로 굴복하고 나올 북한을 한국 정부가 올림픽에 끌어들이고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 영 못마땅하다는 기색이다. 북의 입장에 획기적 변화가 없는 한 미국이 남북 정상의 만남에 동의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동안 북핵을 둘러싼 외교무대에서 따돌림을 당한다는 `코리아 패싱'비판에 시달렸고, 대화와 평화적 해결만 중시하는 무기력한 외교를 펼친다는 지적도 받았다. 미국의 군사적 옵션에 반대하는 바람에 국내 보수세력들로부터 한미동맹을 해쳐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이번 올림픽에 북한을 참여시키면서도 적지않은 고초를 겪었다. 야당과 보수층으로부터 “천신만고 끝에 유치한 동계올림픽을 북한의 체제 선전장으로 제공했다”는 비난을 들었고 `평양올림픽'을 열고 있다는 조롱도 받았다. 여자하키 단일팀을 구성하면서는 지지층이 등을 돌리는 아픔도 감내했다.

이제는 북한이 답례를 해야 할 차례다. 우선 핵보유국 지위를 공인받아 영구적 안보를 구축하겠다는 사고에서 한 걸음 물러나야 한다. 그렇지않으면 남북대화를 한들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뿐 아니라 어렵게 만든 대화 기조도 유지하기 어렵다. 미국은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4월로 예정된 한미연합군사훈련부터 강도 높게 치르자고 제안할 것이다. 북한은 남한이 그 요구에 신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주거나, 아니면 감수해야 한다. 군사훈련을 두고 북한과 한·미가 다시 험악한 말싸움을 벌이는 상황이 재현된다면 지금까지 남북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 올림픽에서 세계를 감동시켰던 가슴 벅찬 장면들도 허망한 해프닝으로 전락할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거기서 결실을 일궈내려면 문재인 정부가 새로워진 국면을 주도할 수 있도록 북한이 양보의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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