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람, 우암(3) 위사공신
큰 사람, 우암(3) 위사공신
  • 강민식<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 승인 2018.02.1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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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 강민식

조선왕조 5백여 년 역사 속 모두 28차례의 공신을 배출하였다. 나라를 세운 개국공신으로부터 영조 때 무신란(戊申亂)을 진압한 공으로 녹훈한 분무공신에 이른다. 대략 20년마다 한 차례씩 커다란 고비를 넘긴 결과다.

그런데 이러한 공신 녹훈은 나름 유기적인 면도 엿볼 수 있다. 나라를 세운 직후 곧이어 자기도태 작업을 통해 정예화하려던 작업이 조선 초기에 여덟 차례나 공신 교체로 나타났다. 이후 늘어난 공신의 후예와 더욱이 새로 관직에 진출하려는 신진 사류들을 한정된 관직으로는 수용할 수 없었다. 외교적 현안이나 국난극복을 제외하면 왕권과 신권의 줄다리기, 붕당의 형성과 갈등이 빚어낸 결과였다. 따라서 자연스레 집권세력의 교체가 뒤따랐다. 역시 적은 관직 수에 따른 순환구조였다.

그런데 28공신 중 명종 때의 위사공신, 광해군 때의 위성·익사·정운·형난공신, 경종 때의 부사공신 등 6번의 녹훈은 무효가 되었다. 권력이 바뀐 후 `적폐'를 청산한 결과였다. 많은 사림을 죽인 위사공신과 광해군의 권력 유지를 위한 여러 차례의 무고사건, 또 경종 때의 무고사건이 그렇다.

위사공신(衛社功臣)은 명종 즉위와 대윤 일파를 제거한 가해자에게 부여한 공신호로, 원래 보익(保翼)공신에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지난번 정렴을 이야기한 을사사화의 배경이다. 위사공신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익숙한 이름들이 많다. 후일 노론의 영수인 민정중 형제의 5대조인 민제인(閔齊仁), 당대 학식으로 명망있던 이언적(李彦迪), 이윤경(李潤慶) 등도 포함되어 있다. 훈척에서 사림으로 권력이 바뀌며, 또 사림 내 갈등도 일면 보인다.

위사공신 3등에 이름을 올린 송기수(宋麒壽, 1507~1581)가 있다. 삼현려의 주인공인 송귀수나 송인수와 같이 수(壽)자를 항렬로 쓰고 있으니,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송기수는 입향조 송세량의 형, 송세충(宋世忠)의 아들이다. 송기수는 공신에 올랐고, 사촌형 송인수는 을사사화의 여파로 두 해 뒤 목숨을 잃었다. 한 할아버지의 손자들이 순간 충과 역(逆)의 갈림길에서 다른 길을 갔다. 물론 사화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자 후회한 정순붕이나 `형을 모함한 공신'이란 비난을 받고 이후 윤원형 제거에 나서기도 했던 송기수였다.

그런데 사약 받아 죽은 송인수의 신도비를 송기수가 썼다. 후대 삼현으로 `알려진' 송귀수의 묘갈문도 지었다. 한편 송인수의 외아들 송응경은 후사가 없어 송귀수의 손자 송승조(宋承祚)로 후사를 이었고, 또 그의 아들 송시혁이 아들을 못 얻어 송시영(宋時瑩)의 막내 송기명을 양자로 들였다. 송기명의 형, 송기태(宋基泰)가 그의 후사를 이었으니 이래저래 복잡한 인연이다.

아무튼 그가 송인수 신도비에 음기(陰記)를 덧붙이고, 시호를 받기 위한 시장(諡狀)도 썼다. 송귀수의 가지에서 송인수의 후계마저 안았다. 을사사화의 여파로 죽임을 당하고 청주지역의 명현(名賢)으로 추앙된 송인수의 위상은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런데 을사사화로 반대편에 섰던 송기수는 오직 외손이었던 당대 명유 신흠(申欽, 1566~1628)의 역할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양반관료사회를 지향했던 가치 속에서 송기수 가계는 매우 두드러진다. 송기수를 포함하여 직계 증조 송요년, 송순년 형제, 조부 송여해, 부친 송세충, 그리고 아들 송응개, 송응형 형제 등 5대 7명이 문과에 급제했다. 벌열로서 위상이 상당하다. 헌데 송응개(應漑), 응형(應炯) 형제는 1579년 이이(李珥) 탄핵에 앞장섰다. 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기호학파의 종주인 그가 이들을 곱게 볼 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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