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목은 꽃을 피우지 못한다
고사목은 꽃을 피우지 못한다
  • 안승현<청주시문화재단 비엔날레팀장>
  • 승인 2018.02.06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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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
▲ 안승현

`만듦방'미술을 한다고 부모님 집에서 나와 마련한 2.5평짜리 자취방 이름, `깨비방'신문 돌리고, 미술학원 간사하면서 돈 좀 모아 2년 뒤 추가 마련한 2평짜리 방 이름, 단칸방 자취로 시작해 9년 뒤에 신혼집으로 꾸미고, 그로부터 만 22년이 되는 올해 보금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신문을 돌리며 주워온 벽돌 한 장 한 장으로 책꽂이를 쌓아올리고, 버려진 나무를 모아다 침대를 만들어 생활하던 자취방에서 다섯 가족이 사는 보금자리로 변한 공간을 떠난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작지만 조그마한 모래밭을 만들어 모래와 흙을 거실로 화장실로 나르던 시간의 공간, 비닐로 풀장을 만들어 세 아이가 매일같이 시끌벅적하던 집, 하숙하던 집을 수리한 집이라 방이 많아 곳곳이 보물 창고가 되고, 집 안팎 구석구석 식물과 벌레들이 가득해 숲을 이룬 공간, 그간의 온기와 웃음이 가득했던 집을 이젠 떠나야 한다.

30여 년의 시간을 담았던 집을 떠나려니, 나보다 먼저 아이들이 아쉬워한다. 신혼집을 꾸미려 미술학원 수업 끝난 시간 이후로 하루에 몇 시간씩 직접 수리를 하고, 아이들이 자라 집이 비좁아지면서 아이들 방을 만든다고 가족이 모두 페인트칠 작업을 하면서 만들어낸 집인데, 그러다 보니 자그마한 공간들이 만들어지고 미로처럼 연결된 공간이 꽤나 정이 가는 집이었는데, 곳곳이 잔손이 너무 많아 찾아오는 사람마다 이 집은 절대 이사 못 갈 집이라고 하던 집을 떠나게 되었다.

어찌 보면 3명의 아이가 나고 자란 집이라 더욱 그러하겠지만, 자취하던 집이 신혼집이 되고 성년이 되는 아이들을 길러내었던 집이라 가슴 한편이 자꾸 헛헛해진다.

한번은 제조창 광장을 지나다 눈이 펑펑 내리던 날 광장에서 목 놓아 울었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가 6.25전쟁 이후 부상에서 회복 후 처음 가래질을 하며 만들어진 이 공간이 재생이 아닌 개발의 방향으로 가는, 나의 무능함에 속상하고 아버지의 평생의 시간이 담겨진 이 공간이 나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흔적의 미진들이 축적된 공간이어서 더욱 그랬을 듯하다.

보은지청을 마지막으로 퇴임할 때, 퇴임 후 앉은 자리에서 긴 시간 늘어놓던 이야기의 시간들이 이 공간 곳곳에 그려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 본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속상한 마음이다. 1970년대 당시 영부인이 식수했던 표지석은 우연하게 찾아냈지만, 정작 나무는 찾아볼 수가 없고, 지금도 연초제조창의 많은 사람과 호흡을 함께 나누었고 지켜내던 나무들이 시간의 연속성을 가져야 하지만 이런저런 알량한 이유로 송두리째 없애는 상황에서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적어도 50년 이상의 시간을 간직한 것들의 공간에 갖가지 것들이 아직도 호흡을 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싹을 지속적으로 틔울 수 있는 것들은 지켜내었으면 한다.

우연찮게도 목 놓아 울던 다음날 엄마가 돌아가셨다. 누나가 떠나고 4개월 만이다. 주말이면 찾아뵙기에 토요일 아침이면 여지없이 전화벨이 울리고, 조그마한 일이라도 연신 연결하던 번호가 뜨질 않는다. 힘이 부치는 걸 알면서도 땅이 노는 걸 볼 수 없었기에 마늘과 양파를 놓았고, 비닐로 보온해준 엄마의 흔적이 있다. 어느 것 하나 헛되이 버리지 않고 쓸 것을 예상하기에 모아놓은 것들이 있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틈도 없었기에 여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가슴이 메어진다.

시간의 흔적을 영구히 지속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임을 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의 흔적을 내려놓기란 더더욱 힘든 일인 듯싶다. 이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경계를 넘었음을 인지하고 있지만, 포기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죽은 나무에서는 더 이상 꽃이 피질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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