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최초의 동굴유적 조사
-단양뒤뜰굴유적
해방 후 최초의 동굴유적 조사
-단양뒤뜰굴유적
  • 우종윤<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18.02.04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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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 우종윤

인류역사의 첫 장을 여는 Paleolithic Age, Old Stone Age라는 용어는 유럽에서 1865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한자문화권에서는 이 용어를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구석기시대라는 용어는 1920년대 초반에 신문, 잡지 등 언론매체를 통하여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다. 이는 학술적이라기보다는 지식의 대중화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이를 통해 구석기시대라는 용어가 국내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1933, 1935년 함북 종성 동관진유적에서 구석기시대의 석기와 동물화석이 발굴되어 구석기시대의 존재가 확인되었음에도 식민사관에 의해 부정되었다. 이후 1958년 김정학 교수(고려대)는 동관진 유적과 유물을 지질학, 고동물학, 고고학적으로 폭넓게 다시 연구하여, 이 유적이 구석기시대 유적이라는 견해를 밝히었으나 당시 학계의 입장은 여전히 부정적 시각이 대세를 이루고 있어 인정받지 못하였다. 우리 역사의 시작이 구석기시대로 인식하고 국정교과서에 실리게 된 것이 1974년이니 40여 년간은 우리 역사에서 잃어버린 시간인 셈이다.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 국사학계 시각은 우리나라의 민족구성 및 원시사회의 기원은 신석기시대 이전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즉, 석기시대=신석기시대라는 분위기가 학계 전반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던 때이다. 그러한 인식은 웅기 굴포리(1963년)와 공주 석장리유적(1964)이 발굴되기 전까지 지속된다.

이처럼 부정적 시각이 팽배해 있었던 학계의 분위기 속에서도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구석기유적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미국펜실바니아 대학교 인류학과 교수인 쿤(Carleton Stevens Coon)은 그의 부인과 함께 1956년 10월 15일부터 1957년 2월 29일까지 166일간 일본, 한국, 대만, 인도, 프랑스 등 아시아와 유럽 11개국을 인류학 답사하였다. 처음 일본에서 3주간 머문 후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하여 김정학 교수와 함께 단양 일대의 석회암지대에서 구석기시대 동굴유적을 찾고자 하였다. 1956년 11월 초에 쿤 교수 일행이 찾은 동굴이 단양군 단성면 북하리에 있는 뒤뜰굴이다.

뒤뜰굴은 굴 입구너비 11.5m, 길이 28m이며 입구부터 13m 지점까지 넓은 광장이 형성되어 있고, 이후 두 갈래로 갈라진 가지굴이 있다. 쿤 교수는 굴 입구에서 약 6.4m 지점에 1×1m 범위를 80cm 깊이까지 시굴조사 하였다. 조사는 추운 날씨로 땅이 얼어 있어 큰 성과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쿤 교수가 특별히 단양의 뒤뜰굴을 선택하여 조사한 점이 주목되며, 남한강 위쪽에 위치한 이상적인 굴이라는 점, 굴 내부의 평면도와 시굴구덩 위치 및 범위를 도면으로 남긴 점, 퇴적층을 관찰하고 기록한 점 등은 고고학적 조사가 비교적 충실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쿤 교수는 중국과 같이 한국에도 구석기시대 유물이 많이 있을 것으로 확신하며, 뒤뜰굴이 이를 증명해 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쿤 교수가 뒤뜰굴을 조사한 후 56년 만인 2011년 11월 한국선사문화연구원에서 다시 시굴조사하여 쿤 교수가 시굴한 지점을 확인하였고, 찍개·몸돌·격지 등 석기와 사슴·박쥐 등 동물화석을 발굴하여 쿤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였다.

뒤뜰굴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진 동굴유적이며, 당시 구석기유적의 존재를 부정하던 인식이 대세를 이루던 시기에 그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학사적으로 높게 평가된다. 이후 금굴, 구낭굴, 상시바위그늘 등 단양지역의 동굴유적 조사의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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