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과 노옹
공산성과 노옹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8.02.01 19: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최명임<수필가>

공산성 빈 무대를 한 바퀴 돌았다. 말발굽 휘날리며 떠난 주인공들을 떠올리며 교감도 하였다. 작은 고을의 성에 남겨진 표적表迹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기쁜 소식까지 접하였다. 백제 후손들의 자긍심이 보인다.

이야기는 남아 관객을 불러들이는데 유난히 와 닿는 사건들이 심금을 울린다. 백제 의자왕은 이곳 피난처에서 끝내 적에게 나라를 내어주었다. 백성의 피땀으로 술잔을 만들고 그들의 피눈물을 담아 마셨던 무능한 군주, 그 역시 마지막 순간에는 피눈물을 흘렸으리라. 무능한 군주의 끝은 시대를 막론하고 비참하기 짝이 없으니 그때를 보는 듯 지금을 보며 탄식이 절로 나온다. 백제의 눈물을 금강에 묻고 사라진 궁터에 발걸음을 옮기려니 바람이 우왕좌왕 그날을 보는 듯 무겁다.

임진란 때는 공산성에서 승병을 훈련하여 왜적에 대항하였다. 조선의 백성임을 내세워 목탁을 내려놓고 전의에 불탔을 것이다. 칼을 내려놓은 뒤에는 아군도 적군도 구별 없이 원혼들을 위해 목탁을 들었을 것이고 지금도 염불 소리는 여전하다.

국태민안을 꿈꾸며 왕위에 오른 인조는 그를 왕좌에 오르게 한 일등공신 이괄의 역습으로 이곳까지 피신해 왔다. 이괄의 칼날을 피해 황급히 숨어든 공산성에서 파발 군의 말발굽 소리를 못내 기다렸을 것이다. 일각이 여삼추라, 산란한 마음을 나무에 의지하고 달이지는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 심정을 헤아릴 것도 같다만, 나무를 어여삐 여겨 벼슬을 내렸다니 나무는 읍하고 망극하다 아뢰었을까.

편자가 다 닳도록 군마가 오르내렸을 성에 바람이 한가롭다. 공산성의 깃발을 붙들고 파닥이다 누각을 돌아 유유히 곰나루로 빠져나간다.

시간도 성을 에돌아 이야기를 남기고 그렇게 강나루를 빠져나갔다. 강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실과는 무관한 듯 숨소리가 고르다. 문득 강을 내려다보다 곰나루에 뱃머리를 묶는 더벅머리 사공을 만난다. 만남과 이별의 희비와 망국의 눈물과 승자의 기쁨이 곰나루 사공의 배를 타고 백제에서 조선까지 건너갔으리라.

앞서던 동행이 밑도 끝도 없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고 고목을 올려다본다. 지나온 시간만큼 굵어져 버린 옹이가 군데군데 박혔고 비바람에 패인 뿌리가 등창을 앓고 있다. 죽자고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서 해진 옷자락처럼 너덜거리는 노옹의 살점을 보고 그가 탄식하였나 보다. 노옹은 성의 역사를, 성은 노옹을 무겁게 떠메고 있다.

언덕 아래로 내려서니 영은사가 반긴다. 은행나무를 문지기로 세워 두고 스님은 동안거에 드셨나, 무수하게 떨어진 은행알만 발길에 휩쓸린다. 업보를 녹이느라 세파에 시달리는 나처럼 후려치는 바람을 맞고 있다.

아수라가 떠난 공산성에는 뭇 사연들과 부처님의 자비로운 미소가 머물러 있다.

대웅전 옆 산바라지에 소년인 듯 청춘인 듯 나무 몇 그루가 바람을 몰고 있다. 새파랗게 어린 것이 객기를 부린다. 돌아서서 건너편 노옹을 향해 묵례하였다. 그리고 어린나무에다 한마디 하였다. `우리는 결코 저분과는 비교 불가한 존재니라.' 공산성은 산사와 노옹의 연륜으로 더 깊이 있게 다가왔다.

가시적 거리를 벗어난 이야기들이 자꾸만 흐려져서 카메라에 담고 돌아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