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습작
기억의 습작
  • 이재정<수필가>
  • 승인 2018.01.2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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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이재정<수필가>

“툭”하고 목걸이가 끊어졌다. 구슬이 사방으로 굴러 퍼진다. 쥐고 있던 생각의 고리가 비보(悲報)에 마디마디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산산이 흩어진 구슬을 보니 고였던 울음이 터진 봇물처럼 밀려왔다.

현관문을 밀치고 나온 세상은 안개가 점령했다. 날씨가 나의 마음을 위로하려 함인가. 안개비가 내리고 있다. 어제는 넋을 놓고 보낸 밤이다. 삼십 년을 넘도록 내내 기다려온 소식이었다. 이제야 전해진 기별은 그녀의 급작스런 죽음을 알리는 부고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당장 달려가는 게 맞는데, 나는 일터로 향하고 있다. 그녀와 떨어진 세월만큼이나 수원은 내게 먼 거리가 되었나 보다.

그녀는 나와 많이 닮았다.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성격도 같았다. 사교적이지 못한 나에게 말을 걸어준 유일한 애였다. 비슷한 구석이 많아서 중학교 시절의 단짝이 되었다. 영원한 친구이기로 맹세도 한 사이였다. 졸업식 날은 헤어지는 날이었다. 그녀는 집안형편 때문에 서울에 있는 산업체 학교에 가게 되어 섬유회사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식이 끝나자 차가 그녀를 싣고 떠났다.

그 후에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에 떨어지면서 서울로 올라가 직장을 다닌 적이 있다.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가 와서 우리는 만났다. 반가우면서도 어색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녀를 본 것이 이게 끝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 만났던 그날이 깜깜해졌다. 어디서 만나 무엇을 했는지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무리 기억해내려 해도 웬일인지 내 머리에서 증발해버렸다. 때때로 떠올리려고 애를 써 봐도 소용이 없었다.

둘의 아득한 시간을 찾고 싶었다. 그녀를 만나면 끙끙대보아도 선명해지지 않은 기억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다툰 듯도 한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여쭤보고 혹시라도 내가 잘못한 일이라면 사과하려 했다. 변치 않자던 우정의 끈을 다시 잇고 싶었는데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내가 소식을 알려고 발버둥을 쳐도 나의 반경에서 숨었던 그녀였다. 아들이 보내온 문자에는 엄마의 핸드폰에 입력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알리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왜 그녀는 나의 연락처를 알고도 한번을 찾아주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흐려진 시간 안에 나를 원망할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보고픔과 궁금증이 가슴 모퉁이에서 늘 떠나지 않았다. 언젠가는 맑은 얼굴로 나타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한 말도 다 거짓이다. 나의 예감은 틀렸다. 그녀의 앞에 서서 작별을 고해야만 된다. 잘 가라고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야만 한다. 나는 끝내 가지 못하고 마음만 동동 구르다 답을 보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내 안에서 그날이 연기처럼 날아가고 있다.

이제 함께 맞춰볼 수조차 없게 된 조각들이다. 제자리를 찾지 못할 파편들이 퍼즐 위에서 이대로 영원히 미완이 된다. 그렇게 백지의 하루가 기억 속에 묻히고 있는 것이다.

어제는 오늘을 지나 내일로 흐른다. 물살은 갈수록 더 빨라진다. 거기에 기억을 실으니 어제는 오늘의 습작임을 비로소 알겠다.

또한 오늘은 내일을 위한 습작임이 분명하다. 비록 오늘이 습작일지라도 오늘을 힘껏 살아볼 일이다. 그래야 내일이 후회가 남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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