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낙타와 정글의 사자
사막의 낙타와 정글의 사자
  • 이영숙<시인>
  • 승인 2018.01.28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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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 이영숙<시인>

사막 한가운데 짐꾼의 길을 걸어가는 낙타가 있다. 사막의 낙타와 정글의 사자는 전형적인 주인과 노예의 공식이다.

어느 날 강력한 신조로 다가온 인문학의 화두인 `나는 누구인가(Who am I)'거기에 부정할 줄도 모르며 지배 질서의 도덕을 착실히 학습하는 낙타가 보였다. 주어진 상황을 회의하는 법 없이 불쑥거리는 욕망을 도덕적이거나 종교적 태도로 억누르던 견인주의자, 그것이 지금까지 낙타로 살아온 내 삶의 일반적인 이력이다. 등에 얹은 짐의 성격도 모르고 선행한 발자국들을 따라 행진한 사막의 삶이다.

정의가 실종된 세상, 부조리가 팽배한 세상에서 비겁하게 낙타로만 살아야 하는가. 한때 니체는`나는 누구인가'라는 실존 문제로 발목 잡은 인물이다. 니체는 인간 정신의 세 가지 변신 과정을 낙타→사자→어린이로 설정한다. 사막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의미하고 용은 명령하는 주체로서의 지배 담론과 권력을 상징하며 낙타는 노예 도덕, 사자는 주인 도덕, 어린이는 창조 도덕을 상징한다. 창조는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다. 고체화된 가치를 비판 없이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는 액체적 사고일 때 가능하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말한 사자의 단계가 절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에게 영향을 받아 쓴 자전적인 시 `사자는 짐을 지지 않는다'이다. 이제는 불의한 것에는 “아니오”라고 부정할 수 있는 단계로 들어서야 한다. 비판의식이 결여된 무조건적 순종은 미덕은 고사하고 범죄일 뿐이다.

낙타는 제 어미가 그랬고 그 어미의 어미가 그래 왔듯이 아무런 의심 없이 짐을 지고 사막을 행진한다. 그러나 사자는 제 어미의 어미가 그래 왔듯이 상황을 회의하며 함부로 몸을 굽히지 않는다. 사막의 채찍을 기억하는 낙타와 정글의 자유를 기억하는 사자, 먹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무릎을 세우는 일, 즉 그 인식의 초점은 주인과 노예의 습성에 있다. 비록 정글의 삶이 적에게 노출돼 있고 어렵게 먹이를 구해야 하는 고단한 여정이지만, 육체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정신의 자유로움과 맞바꿀 수는 없다.

스피노자는『에티카』에서 인간의 감정을 마흔여덟 개로 정리하였는데 그중 비루함을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극복할 노예의식으로 판단한다. 자본이 제공하는 화려한 미끼를 마다할 사람은 적지 않다. 또한, 그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오롯이 자유롭기도 힘들다. 적어도 새끼를 낳은 어미라면 일정 시기 낙타로 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인생의 반환점을 도는 시기에 잘못된 틀이나 고답한 제도에 갇히지 않고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바퀴, 순간순간 놀이할 줄 아는 어린이 정신이 들어온다.

주인의식과 주체 정신 그것은 한때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온갖 기교와 멋을 부려 낭송하던 이육사의 「광야」에 등장하는 백마 타고 올 초인의 의미일 수도 있다. 「광야」의 시적 화자가 제시한 현재의 희생을 통해서 뿌린 씨앗을 거두어 노래할 민족사의 중요 인물인 그 초인이다. 니체가 말한 초인정신과 먼 성격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선 언제든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부패한 무리를 과감히 떠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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