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인 사냥용 캠프 - 단양 구낭굴유적
구석기인 사냥용 캠프 - 단양 구낭굴유적
  • 우종윤<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18.01.28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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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 우종윤<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1986년 2월 초 단양에서 국사교사로 근무하는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늦깍이 군생활을 마친 필자를 위로 할 겸 보관 중인 이상한 큰 뼈들을 감정할 겸해서 매포로 오라는 것이었다.

친구의 하숙방 한켠에 신문지로 대충 싸놓은 몇 개의 뭉치가 보였다. 학생들이 주워 온 뼈들이란다. 살펴보니 곰 아래턱뼈, 곰 송곳니, 사슴턱뼈와 발등뼈 등으로 화석화가 잘 진행된 구석기시대의 동물화석이었다. 바로 이들 뼈를 주운 곳을 찾아갔다. 단양군 가곡면 여천리 여천마을 뒤편 깊은 골짝 산중턱에 남동향으로 뚫려 있는 동굴이었다.

동굴 입구는 대부분 메워지고 오른쪽 부분에 한 사람이 겨우 기어들어갈 정도의 틈이 조그맣게 나 있었다. 이 틈을 통해 동굴안으로 기어들어가니 바로 넓은 광장이 나왔고, 굴 바닥면에는 석회석 낙반석들과 함께 동물뼈 화석들이 드러나 있었다. 굴 바닥은 군데 군데 얇게 파여 있었을 뿐 전반적으로 잘 보존된 상태였다. 마침내 완전하게 잘 보존된 동굴유적을 확인한 것이다. 1986년 3월 1일이었다. 이렇게 찾게된 굴이 구낭굴이다.

이후 정밀 발굴조사를 위한 사전조사로 동굴안을 살피던 중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동굴을 드나들었던 흔적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굴벽에 새겨놓은 첫 기록은 1973년 8월 11일 김○○이고, 가장 늦은 것은 1986년 6월 13일 이○○이다. 그 사이 구낭굴을 드나들며 벽면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106명이 확인되었다.

이로 보면 적어도 1973년 이전부터 사람들은 구낭굴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꾸준히 드나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동굴 퇴적층을 전혀 훼손시키지 않았다는 점은 큰 행운이라 생각된다.

구낭굴은 입구넓이 약 550cm, 길이 약 140m의 규모로 동굴의 겉모습과 내부 퇴적층이 매우 잘 보존되어 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큰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1986년부터 2013년까지 27년 동안 충북대학교 박물관(3회)과 한국선사문화연구원(3회)에서 6차례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은 민가와 멀리 떨어진 산골짜기 속에서 어두운 동굴내부를 조사하는 것이어서 매우 힘들게 진행되었다.

발굴조사는 구낭굴에 살았던 당시 사람들의 주된 생활층인 3지층(1문화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사결과 사람뼈와 풍부한 짐승화석, 식물화석, 석기 등이 출토되었다. 사람뼈는 손등뼈,손가락뼈 및 발가락뼈 등이 찾아졌는데, 이들 뼈로 가늠할 때 구낭굴 사람은 163~169cm의 키를 지닌 건장한 어른 남성으로 추정되었다.

가장 많이 발굴된 짐승뼈들은 곰, 호랑이, 시라소니, 코뿔이, 원숭이, 사슴, 노루 등 25종의 짐승 종으로 분류되며, 짐승 마리수로 계산하면 262마리가 된다. 구낭굴 사람들이 사냥한 짐승은 최소 25종 262마리인 셈이다. 이들 짐승 중 75% 이상이 사슴인 것으로 보면 구낭굴 사람들은 사슴사냥을 통해서 생활의 주된 식량원을 확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잡힌 사슴들의 계절분석으로 볼 때 구낭굴 사람들은 일년 내내 이곳에서 살았던 것이 아니라 가을에서 봄까지 3계절 동안 계절적으로 사냥활동을 위해 이용하던 사냥용 주거유적으로서의 성격이 짙다. 즉, 구낭굴은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사냥용 캠프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한편 25종의 동물화석과 함께 꽃가루분석, 수종분석 등의 분석자료를 통하여 볼 때 약 4~5만년 전 구낭굴에서 사람이 살았던 시기의 환경은 따뜻하나 습기가 많았던 기후이고, 삼림은 늘푸른 바늘잎나무와 지는 넓은잎나무가 무성하였던 기후에서 차츰 서늘한 기후로의 변화가 있었던 시기로 가늠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구낭굴의 구석기문화가 꽃 피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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